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

분류 문학 > 이상적인물형 > 군은(君恩)형

• 갈래 : 전설
• 시대 : 삼국
• 신분 : 왕족
• 지역 : 호남
• 출처 : 삼국유사 ()
• 내용 :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로, 어려서부터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었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해 ‘해동의 증자’라 불리었다. 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뒤를 이어 왕에 즉위한 의자왕은 즉위 초, 밖으로는 당나라와 외교를 쌓고,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시키며 민생을 잘 돌봐 백성들에게 칭송이 자자했다. 의자왕은 특히 신라에 대해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다. 즉위하자마자 신라를 침공해 미후성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을 퍼부어 대야성과 당항성 마저 빼앗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신라라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신라의 선덕 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고,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오는 백제의 군사에 대항했다.

백제와 신라 사이에는 몇 년 동안 밀고, 밀리는 전쟁이 계속됐다. 651년, 의자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바쳤다. 그런데 돌아오는 사신 편에 당나라 고종의 편지가 전해졌는데, 그 내용이 신라에게서 빼앗은 성을 다 돌려주라는 내용이었다. 그 말에 승복할 수 없었던 의자왕은 일단, 성을 돌려주었지만 655년 다시 신라의 30여 개 성을 격파했다. 이때, 백제 내부에서도 의자왕과 신하들, 그리고 귀족들 사이의 내분이 심해지고 있었다. 의자왕의 잘못을 고하던 충신 성충은 의자왕의 오해를 받은 채, 죽고 말았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백성들의 민심도 멀어져만 갔다. 도성 안에는 이상한 소문들이 떠돌았으며, 혼란한 틈을 타서 도적떼도 활개를 쳤다. 이런 와중에 660년, 당나라 소정방은 13만의 군사를 끌고 와 신라와 연합해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상황에서 신하들은 서로 다른 의견들을 내놓았고, 의자왕은 얼른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나당 연합군은 순식간에 백제까지 들이닥쳤고, 사태의 위급함을 깨달은 왕은 계백을 불렀다.

그리하여 계백 장군은 결사대를 조직해 황산벌로 나가게 되었다. 계백은 출전을 앞두고 자신의 처자식을 모두 죽이고 전쟁에 나갈 만큼 죽을 각오로 결전을 펼쳤다. 이런 계백 장군의 목숨을 건 싸움에도 불구하고 나당 연합군을 물리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결국 계백과 그 결사대는 드넓은 황산벌에서 마지막 한사람까지 용맹하게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계백의 죽음으로, 더 이상 나라를 보전하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한 의자왕은 사비성을 떠나 웅진으로 피신했다. 이 때, 의자왕의 3천 궁녀가 절벽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는데 그 모습이 한 송이 꽃과 같았다. 이 바위는 ‘낙화암’이라고 불리며 아직까지도 삼천 궁녀의 절개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당의 소정방이 곧 사비성을 포위하자, 의자왕은 항복하고 말았다. 그렇게 백제는 678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 이 후, 의자왕은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그 이후, 태자 풍이 앞장서서 다시 백제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펼쳐지기도 하지만, 결국 내분과 함께 나당 연합군에게 전멸되고 만다. 4년 동안 이뤄졌던 백제 되살리기 계획마저 물거품이 되면서 백제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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