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조의 호법정치와 불도징의 공로

후조의 호법정치와 불도징의 공로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중국
• 참고문헌 : 중국불교사

굽다왕조는 전타라굽다 2세(월호2세)가 왕도를 아유타에 옮긴 후 서력 41년에 그가 죽고 그의 아들인 구마라굽다(童護)가 즉위한다.
그러나 그의 말년, 즉 서력 5세기 중경에 이르러서는 북인도내에 있어서 흉노의침략적 세력이 심히 강성하였었다.
이로 말미암아 번영이 극하던 굽다 왕조도 점차로 최운의 길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제 6세기 반경에 이르러서는 중인도의 카라궁도국(Kanyakudja)세력이 점차 강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나라 광증왕은 흉노의 강성한 세력을 물리치고 부근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병합하였다.
그런데 그 다음 그의 아들인 광증왕이 7세기 초에 일어나서 동인도의금이국왕인 설상가(Sanka)때문에 모살되었다.
그러므로 그 다음 그의 동생인 희증왕이 즉위하였으니 이 희증왕이 곧 계일왕인데 즉위한 매는 서력 606년이었다.
왕은 북인도 서인도의 양인도를 차례로 다 정복하고 또 동인도의 금이국을 정벌하여 형의 원수를 갚고, 다시 남인도를 정벌하려다가 남인도의 폐왕인 마사자타국왕인 보라계사(Pulikesin)때문에 저지되었다.
그러므로 나-르마다(Narmada)강 이남에는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로부터 왕은 이 광대한 국내에 교육사업과 자선사업과 불교 보호사업 등의 모든 사업을 널리 펴고 그 뿐만 아니라 밀러 외국과도 서로 교통의 길을 열어 국제적인 교제를 잘 취하였으니, 그 예의 하나로서는 당나라 현장이 인도에 갔을 때 호기로 생각하여 사신을 당나라에 보냈더니 당 태종도 역시 왕현석을 사신으로 하여 계일왕조에 보낸 것과 같은 일이다.
계일왕은 또 문학을 좋아하여 문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으니 저 불교희곡인「용의환희」라든지 또는 인도교의 희곡인「보주의열」이란 창작도 이 때의 작품이다.
왕은 또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철저하여 처음에 믿어오던 소승교를 버리고 대승교를 독신하였으며, 또 교육사업을 성행시키고 자선사업을 진흥시켜서 아쇼카의 유업을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혹은 시료원을 설치하고 또 국내에 살생을 금하여 혹은 조세를 경멸하여 민력을 휴양시키며 또 사문 바라문에게 성의를 다하여 보시공양하며 다수의 절과 탑을 건립하였다.
일찍이 도성에서 무차 대회를 행하고 인도 각종교의 승려 5,000인을 초대하였다.
그 가운데 3,000인은 나란타사의 승려였는데 현장도 역시 이때에 같이 참여했다고 서역기에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서력 648년에 계일왕이 서거하자 그의 권신아라나순(Alanashun)이 자립하여 왕위를 빼앗고 사신 왕현석을 거절하므로 현석은 이에 토번, 니파라의 병을 거느리고 공격하여 그를 생포해서 귀국했다고 한다.
현장의 서역기에 의하여 그 당시 대소양승 유행의 상태를 보면 먼저 중인도는 마가다국과 칼라국사의 두나라에 대승교가 성히 유행해졌고, 북인도는 오지나국(Udyana)의 대승교가 가장 융성했고, 서인도는 마랍파와 신도(Sindhu)의 두 나라를 비롯하여 도처에 소승 정량부가 유행하고, 남인도 교살라국(Kosala)에 대승교가 유행했으며 달라비다국(Dravida)에는 소승상좌부가 유행하고 공건나국(Konkana)에는 대소승이 한가지 성히 유행하여 대소승 병행지가 되었다.
그리고 동인도는 오다국(Odra)에 대승교가 제 1위를 점유하고 소승의 상좌부와 청량부가 그 다음에 있었다고 한다.
이상에서 말한 제국에만 한해서도 사원수는 수백 내지 수천에 달하고 승려수도 1만내지 2만에 달할 정도였으니 전 인도를 통 털어 말하면 수십만의 사원과 백여만의 승려가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이와 같이 극도로 불교가 융성했지만 또 타면으로 보면 불교에 대한 다소의 핍박과 타격도 없지 않았으니, 예를 들면 동인도에서는 일찍이 설상가왕의 폭학한 배불행동이 있어서 사합을 파괴하며, 혹은 중인도의 구시나갈라에 이르러 불교를 방해하고, 또는 마가타국에 와서 불탑을 파괴하는 등 악행을 행하였기 때문에 비교적 이러한 지방에서는 다른 지방보다 불교의 세력이 감소되고 그 대신에 외도중 긱나교의 세력이 융성했다고 한다.
기타 남인도에서는 인도교가 유행하는 마사전타국이 있었고 서북인도에서는 외도가 일부 성행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6세기반에는 마뇌바국에 계일왕이 있어서 (이 계일왕은 앞에서 말한 계일왕과 동명이인이다)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승려를 존경하고 사원을 건립하며 또 매년 무차대회를 베풀기를 50여년간 계속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기타 당시의 유명한 대승논사들은 거의가 서인도인이었던 것도 주의를 끄는 바이다.
그러므로 먼저 말한 바와 같은 불교의 박해는 잠시 동안 부분적 또는 지방에 있었던 것을 더 부연하여 부정적으로 전하여 말한 것 같다.
당시의 불교계에 있어서 특이한 변태는 밀교의 유행이라고 하겠다.
현장의 서역기에 의하면 남인도의 타나갈책가국에는 6세기 전반에 집금강신 등을 숭배하고 금강다라니를 독송했다고 한다.
또 7세기경에는 용지(龍智)가 석륜에서 출생하였는데 남인도에 건너와서 밀교를 흥융시켰고 8세기초에는 남인도의 마라야국인 금강지가 용수로부터 밀교를 수학한 다음 중국으로 건너가서 110부 143권이라는 많은 밀교경전을 번역하여 중국밀교를 대성시켰다.
밀교는 남인도에서만 흉융하였을 뿐 아니라 서인도에서도 밀교적 교의가 유행했고 중인도의 나란타사에서도 유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8세기 초경에 중국에 밀교를 전한 선무외삼장도 이 나란타사에서 달마국가로부터 밀교를 전수하였다고 한다.

<인도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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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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