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의 비애

단종의 비애

[ 端宗-悲哀 ]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한국
• 시대 : 조선
• 참고문헌 : 청룡사사지

단종은 이조 제 4대 세종 23년(서기1441년) 7월 23일에 문종(戈宗)의 장자, 세종의 왕세손(王世孫)으로 태어났다.
동방의 요순(堯盾)이라는 칭호를 듣던 성군(聖君) 세종대왕은,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몸에서 8대군(大君), 2공주를 두었고, 다른 빈(嬪)과 숙의(淑儀 正二品)·소원(昭媛 :正四品)의 몸에서 10준 2옹주(翁主)를 두었다.
세종 3년 장자로서 세자를 책봉하였으니, 이분이 후일의 문종이었다.
문종은 타고난 성품이 효성이 있어서 왕자로서의 덕은 있었으나 천질이 병약하여 부왕의 걱정을 끼쳤다.
한편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은 기력이 절륜(絶倫)하고 호방 대담하여 8대군 가운데에 제일 패기 만만 하였다.
문종은 15세 되던 해에 상호군(上護軍) 김오문(金五文)의 딸 휘빈(徽嬪) 김씨와 결혼하였다.
휘빈 김씨는 문종과 동갑인 15세였다.
휘빈 김씨는 자질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시어머니 되는 소헌왕후 심씨의 미움을 샀다.
즉 세자의 몸이 쇠약하여 지는 것은 휘빈의 자색(姿色)이 너무 아름다운 까닭이라고 하여서였다.
휘빈과 세자의 두 사람 사이의 정은 좋았으나, 시어머니의 미움을 산 휘빈은 마침내 17세의 어린나이로 폐출당하고 말았다.
휘빈 다음에 세자빈으로 책봉된 분은, 종부사(宗簿寺) 소윤(小尹) 봉려(奉勵)의 딸 봉씨(奉氏)였다.
봉씨는 자색도 아름답지 못하고 어진 부덕(婦德)도 없었다.
그러므로 세자와의 정분도 자연히 좋지 못하여, 세자는 동갑되는 수측(守則 正六品)인 양씨(楊氏)를 가까이 하여 마침내 경숙옹주(敬淑翁主)를 낳았다.
양씨는 본래 미천한 가운데 태어나서 13세때에 궁중에 들어와서 자색이 아름다운 까닭으로 세자의 눈에 들었으나, 세자빈으로는 책봉되지 못하고 여경당(餘慶堂)의 수측으로 있었다.
수측 양씨가 경숙옹주를 낳게 되자, 세자비인 수빈 봉씨는 자신이 세자의 눈에서 멀어질 뿐만 아니라, 후손이 전혀 없으므로 질투심이 불같이 강해져서 은밀히 수측 양씨를 죽이려고 꾀하다가 마침내 폐출당하고 말았다.
수빈 봉씨가 폐출 당하자 다음 세자빈으로 책봉된 분은, 한성판윤(漢城判潤) 권전(權專)의 발 현덕(顯德) 권씨였다.
권씨는 양가의 규수로서 13세로 궁중에 들어와서 양원(良媛 :正三品)으로 책봉되어 세자를 모시다가, 19세에 세자빈으로 봉해져서 경혜공주(敬惠公主)를 낳았다.
그리고 5년 후인 24세 되던 해(서기 1441년) 7월 23일, 비극의 주인공인 단종을 탄생하였다.
현덕왕후 권씨는 심한 산고(産苦)끝에 아드님에게 젖꼭지 한번 물려보지 못하고 1주야를 고생하다가 왕자를 낳은 이튿날 7월 24일 원통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상을 떠날 때 유언으로 어린 아기는 친정어머니 화부인 최씨와, 혜빈 양씨 두 분께 양육을 부탁하였다. 이렇게 단종은 세상에 출생하면서부터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한편 문종 역시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탄식하여 마지않았으며, 현덕빈 권씨가 별세한 이후로는 더욱 지나친 상심(傷心)으로 몸이 극도로 쇠약하여져서 다시는 빈을 간택하지 아니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밝힐 일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 왕후 권씨가 임종시에 유언으로서 귀중한 어린 아기의 양육을 부탁한 두 분중, 한 분은 친정어머니 화산부민 최씨니까 단종의 외할머니였으나, 다른 한분인 혜빈양씨는 과연 어떠한 분이었던가 하는 것이다.
혜빈양씨는 어려서 궁중에 들어와서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아 18세 때에 한남군(漢南君.聯)을 남고, 24세 되던 해 즉, 단종이 탄생하기 1년전에 영풍군(永豊君)을 낳았다.
두 아드님을 낳은 혜빈양씨는 마음도 어질고 얼굴도 얌전하여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았다.
혜빈 양씨는 정순왕후의 유언대로 단종을 양육함에, 당신의 아드님인 영풍군의 젖은 먹이지 못할 때가 있을지라도 왕세손의 젖은 굶주리게 한 적이 없었다.
단종도 혜빈양씨의 젖을 먹고 친어머니같이 믿고 자라났다.
후일 단종의 복위를 위하여 자기가 남은 두 왕자 즉, 한남군, 영풍군과 함께 3모자가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진 것은, 단종을 양육한 이유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직접 낳은 자식같이 사랑한 까닭이었다.
그리고 또한 한낭군과 영풍군은 단종과는 숙질간이었으나, 혜빈양씨의 손에 함께 길러 났으므로 친형제처럼 정의가 깊었다.
세종대왕께서도 왕세손인 단종을 지극히 사랑하사 어린 손자를 품에 안고 경회루 연못가를 거닐면서, 입궐하는 집현전 학사 성삼문(成三問)·신숙주(申叔舟), 정인지(鄭麟跳)·박정년(朴彭年)등을 돌아보시고, 「이 어린 손자를 경들에게 부탁하오‥‥‥‥」
하는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어린 손자의 후사를 부탁하였다.
단종은 세종 31년(서기 1449년)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니 이때 나이 9세였다.
단종이 왕세손으로 책봉된 지 1년이 지난 세종 32년 2월에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 하였다. 문종왕은 본래 병약한 몸이라 재위 3년만인 임신(壬申)년 5월 14일 승하하고. 어린 왕자 단종이 왕위에 오르니 이때 나이는 12세에 불과하였다.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니 할아버지 세종대왕과 아버지 문종이 승하하였음은 물론, 할머니 되는 소헌왕후도 단종 8세예 작고하였으니 오직 직계 혈육으로는 하나 밖에 없던 누이 경혜공주 마저도 단종 11세되던 신미 (辛未)년에 참판(參判) 정충흠(鄭忠鈗)의 아들 영양위(寧陽尉)정종(鄭琮)에게 출가하였으니 단종은 몹시 고적하고 쓸쓸하였으며, 더욱이 즉위하던 이듬해에는 그를 보필하던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이 수양대군(首陽大音 :世祖)에게 참살당하니 <癸酉靖難.계유정난> 숙부 수양대군을 볼 때에는 범같이 무섭기만 하였다.
단종은 즉위 3년 만인 14세 때에 송진수(宋珍壽)의 따님 송씨(宋氏)를 맞이하여 왕비를 삼고, 김사우(金師禹)의 따님과, 권완(權完)의 따님 두 분을 후궁으로 삼았다.
왕비를 맞이한 지 1년째 되던 단종 4년 윤6월 11일, 수양대군의 측근인 한명회(韓明會)·권람(權擥)등이 선위를 강요하자, 마침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수강궁에 이어(移御)하였다.
이렇게 되니 단종은 12세에 왕위에 오르고 15세에 왕위를 숙부에게 내어 놓은 것이다.
세조 즉위 2년 6월 27일,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유응부(兪應孚)·이 개(李塏)·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등의 사육신들이 단종왕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자, 세조는 이들을 무참히 죽이고, 이에 연루된자 70여인을 모두 치죄(治罪)하고, 또한 성삼문 등이 밀모에 상왕 단종도 관여(關輿)하였다고 하여 상왕을 강봉(降封)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삼아, 군사50인 호송하에 영월 청냉포로 방출하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縣德王后)를 추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또 세조의 동생(세종대왕의 제 6남) 금성대군(錦城大君)도 단종이 앞서 거기에 기우(寄寓)하였다 하여 순흥(順興)에 유배하였다가 후일 노산군의 복위를 꾀하였다 하여 죽이고, 한남군(漢南君) 영풍군(永豊君)등을 아주 후미진곳에 금고하였다가 죽였다.
야사(野史)에 의하면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냉포로 귀양의 길을 떠날 때, 단종을 호송하던 공인으로 첨지(僉知) 어득해(魚得海),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왕방연(王邦衍), 군자정(軍資正), 김자행(金自行), 내시부사(內侍府辜), 홍득경(洪得敬) 네 사람 이었다.
네 사람은 단종을 호송하여 흥인문(興仁門)밖을 나왔다.
단종은 청룡사 우화루에서 왕비 송씨와 마지막 애끓는 이별을 하였으니, 젊은 왕비 송씨를 외로운 산사(山寺)에 남겨두고 차마 옮기기 어려운 무거운 발걸음을 한 걸음 내어 딛고 뒤로 돌아보고, 또한 걸음 내어 걸고 뒤로 돌아보는, 그 가슴 아픈 심정은 그 때 그 정경을 직접 당한 단종 이외의 다른 사람은 감히 상상도 할 수없는 일이었다.
이 광경을 보던 어득해는 불경불충(不敬不忠)한 말로 노산군을 꾸짖고 빨리 떠나기를 재촉하였다.
단종이 우화루에 쓰러져 통곡하는 왕비 송씨를 돌아보면서 어득해에게 끌려 영리교(永離橋)까지 나갔을 때, 송씨마마는 허틀어진 머리를 걷어 올릴 경황도 없이 버선발로 다름질쳐서 단종의 뒤를 쫓았다.
송씨마마가 영러교에 이르렀을 때 호송공인 어득해는 소리를 지르며, 송씨마마가 다리를 건너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리하여 송씨마마와 단종은 다리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서는 송씨마마가 떠나는 단종을 바라보고 한없는 눈물을 홀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단종이 송씨마마를 건너보면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화석처럼 굳어져 한없이 서서 있기만 하였다.
이때 어득해는 소리 높여 꾸짖으면서 무엄하게 단종의 옥체를 밀어 빨리 가기를 재촉하니, 할 수 없이 어득해의 힘에 밀려 돌아서는 단종의 눈에는 피눈물이 고였다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옛날 사람들은 이 다리 위에서의 애끓는 이별을 슬퍼하면서 이런 시(詩)를 지어 읊었다

하교불상봉 (河橋不相逢)
강수원염정 (江楙遠念情)
다리 위에 이별은 차마 못할 일이로세,
강가의 나무들도 슬픔 담북 머금었네.

단종 일행은 서울을 떠나서 당일에 의정부(議政府)에 도착하였다.
점심, 저녁 수라(水刺)도 올리지 않아서 왕께서는 지칠대로 지쳐서 누워 있을 때, 양성사람인 차성복(車聖馥)이 몰래 시루떡을 쪄가지고 왕께 올리니, 왕께서는 이를 반가이 받으셨다.
단종왕은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면서 마침내 영월 청냉포에 도착하였다.
청냉포는 무서운 산골로서, 사방이 산으로 첩첩이 둘러싸이고 양쪽으로 두 줄기 강물이 흐르는 외로운 섬과 같은 곳이었다.
단종은 이곳에서 외로운 몸을 의지하고 귀양살이를 시작하게 되었으니, 그의 생활이란 쟁반같이 둥근달이 조각달로 이즈러지는 것을 보고 보름과 그믐을 짐작하였고, 구름도 쉬어 넘는다는 앞산 높은 봉에 진달래가 붉게 피니 봄이 온 줄 알았었다.
귀양 오던 그해 병자(丙子)년도 지나고 정축년 봄이 돌아왔다. 이해의 단종의 보령(寶齡)은 17세가 되었다.
겨울 동안 산골 추위로 밖에 나오지 못하던 단종은, 봄이 되자 옛날 사정전 됫뜰의 화사한 봄이 그리워져, 그곳 관풍매죽루(觀楓梅竹樓)에 올라가게 되니, 산골짜기에서 들려오는 두견(杜鵑 :소책새)소리가 몹시 가슴을 슬프게 하였다.
이 두견이란 새는 한편 자규라고도 하는데, 단종은 이 소리를 듣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눈물 섞어 읊으니, 어찌 그의 구곡간장(九曲肝駱)이 다 녹지 않았으라‥‥‥

월백야 측혼추 (月白夜 蜀魂楸)
함수정 의루두 (含愁情 椅樓頭)
이제비 아문고 (爾啼悲 我聞苦)
무이성 무아수 (無爾聲 無我愁)
기어세상고뇌인 (寄語世上苦腦人)
신막등춘자규루 (愼莫登春子規樓)

달 밝은 밤 두견새 울제
수심 품고 누머리에 기대 서니
네 울음 슬프구나 내 듣기 애달퍼라
네 소리 없었으면 내 수심도 없을 것을
여보소! 세상 근심 많은분네
아예 춘삼월 자규루에 오르지 마소

일자원금출제궁(-自寃禽出帝宮)
고신척영벽산중(孤身隻影碧山中)
가면야야면무가(假眠夜夜眠無假)
궁한년년한불궁(窮恨年年恨不窮)
성단효잠잔월백(聲斷曉岑殘月白)
혈류춘곡낙화홍(血流春谷落流紅)
천롱상미문애소(天聾尙未聞哀訴)
호내수인이독청(胡乃愁人耳獨聽)

원통한 새가 되어 한번 임금의 궁을 나옴으로 부터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 속에 있도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이 깊이 아니 들고
해가 가고 해가 와도 한이 다하지 않는도다.
우는 소리 새벽 첫부리에 끊어지니 지새는 달이 희였고,
뿜는 피 봄 골짜기에 흐르니 지는 꽃 붉었도다.
하늘은 귀먹어 오히려 애달픈 하소연을 듣지 못하시는데,
어찌해 수심 많은 사람의 귀만 홀로 밝았는고.

정축년의 화사한 봄과 여름도 지나가고, 산과 들에는 하얀 서리가 내리고, 자갈돌을 씻어 흐르는 산골 물에는 살얼음이 잡히기 시작하였다.
예는 10월 24일!
서울에서 의금부 도사(議禁膚都事) 왕방연이 어명을 받고, 사약(賜藥) 그릇을 들고 영월로 내려왔다.
그러나 왕방연은 차마 약그릇을 올릴 수가 없어 문밖에서 주저하고 있을 때, 단종을 모시고 있던 공생이란 자가 단종의 목을 졸라 북쪽창문 밖으로 끌어내려 참혹하게 승하하게 하였다.
그리고 시체는 강중(江中)에 던진 것을,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翡興道)가 남모르게 건져서, 영월읍에서 5리가량 떨어 진보덕사라는 절 근처에 평토장(平土葬)을 하였으니 단종은 세수 17세로 한 많은 일생을 처참하게 마쳤다.
위에 적은 사실은 주로 병자록(丙予錄)과 음애잡기(陰堐雜記)에 의한 것이나, 정사(正史)의 기록에는 세조가 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珠)을 죽이고, 다시 노산군(魯山君)의 군(君)을 폐하고, 서인(燃人)으로 한 뒤에 또, 영의정(領謙政) 정인지(鄭麟趾)·좌의정(左議政) 정창손(都昌孫)· 이조판서(吏曺判書) 한명회(韓切合) 좌찬성(左贊成) 신숙주(申叔侍)등이 계속 상계(上啓)하여, 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치죄할 것을 주장하매, 마침내 세조는 금성대군에게 사사(賜死)하니, 노산군은 사태가 이에 이름을 보고 자결(自決)하여 승하하신 후 세조는 꿈에 단종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나 조카 즉, 단종을 죽인 것을 책망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그의 능(陵.昭陵)을 발굴하여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이보다 앞서 병자(丙子)년 6월 26일 세조는 종묘(宗廓)에 모셔 있던 현덕왕후의 위패를 김질이란 자를 시켜 부수어 불태우고 폐위(廢位)하여 서인(庶人)으로 하였으며, 동시에 단종의 외조모 화산부 부인 최씨를 역모에 몰아서, 죽은 지 17년된 시체를 꺼내어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후에 관을 쪼개고 시체의 목을 베어 극형에 처하는 것)하고, 단종의 장인 판돈녕 송현수와, 후궁 권씨의 아버지 판관 권완까지도 모두 역모로 몰아 죽였다.
그리고 단종의 시체를 강물에서 건져 장사 지낸 엄흥도도, 이를 거두어 장사 지냈다 하여 그 속적 (屬籍)을 단절하기까지 하였다.
후일에 소능은 제 11대 중종(中宗)때에 복구되고, 노산군은 그 후 제 19대 숙종 24년에야 비로소 복위(復位)가 되어 노산대군(魯山大君)이란 시호(諡號)와 함께「단종」이란 묘호(廟號)를 추상(追上)하게 되었고,성삼문 등 사육신도 이때 관직(官職)을 추증(追贈)하게 되었다.
그리고 엄흥도는 영조대왕때 정문(旅門)이 세워지고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상 단종의 약사(署史)를 요약하여 보면,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고(불기 1996년, 서기 1452년, 만기3785년, 明 代宗 景泰 3년, 壬申)2년후 14세에 정순왕후를 맞이하고, 또 1년이 지난 15세에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이 되었으며, 그 다음해 사육신들이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될때,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당하였으니, 세조의 불타는 야욕앞엔 권력은 피보다 진한 것이었다.
유배가는 도중에 청룡사에 들러 왕비 정순 왕후와 애끓는 이별을 하였고, 그 다음해 세조 3년(불기 2001년, 서기 1457년, 단기 3790년, 明 英宗 天順 元年 )
10월 23일 단종은 17세로 한 많은 일생을 적소에서 마쳤다.

<靑龍寺寺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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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2/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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