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라집의 역경사업

구마라집의 역경사업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중국
• 참고문헌 : 중국불교사

전진의 뒤를 이어 건립한 후진은 불교가 강성하기가 전진시대보다 수승하였다.
특히 진주(秦主) 도장(姚養)·요흥(姚興)의 불교신앙은 도저히 부견이 추급할 수 없을 정도이었다.
부견은 불교에 의한 치세를 목적으로 하였으나 후진주에 있어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불교의 연구에까지 들어갔었다. 후진의 불교 대표자는 나집이다.
후한 이래 진에 이르리까지 서역의 삼장이 계속 와서 각종 경전을 역출하니, 교학이 일성하였으나 모두 개인적 사업이었고 대규모의 역경사업은 되지 못하였다.
국가의 보호하에 불전연구를 비롯하여 중국 역경사업에 일신개혁을 획한 것은 나집이다.
당의 현장과 함께 역경사상의 2대 역성이라고 호칭되며 역경의 완비와 역어의 유창함은 그 전후를 구분함과 동시에 불교교학은 나집에 의하여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나집에 이르러서 특히 대승교가 전래하고 종파라는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
구마라집(344~413)은 구가국 사람으로 7세에 출가하여 비담(毘曇)을 독송하여 그 뜻을 통하고, 9세 때에 어머니를 따라 계빈에 들어가 반두달다로부터 잡장(雜蒸)과 중·장(中·長) 2함을 받고 어머니와 함께 쿠자에 돌아왔고, 후에 소륵국에 이르러서 아비담육족제른(阿毘曇六足諸論) 및 <증일아항>을 외우고 다시 구진에 돌아와서 4위타(四韋陀) 5명 (五明) 제론 기타의 외전을 배우고, 불타사사에게서 십송을(十誦律)을 배우고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서 율을 받고, 수리야소마에게서 대승을 자품하여 중·백 2론을 배우고, (방광경)을 위시한 그 밖의 대승경을 읽으니, 그 명성이 서역에도 전보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전진과 부견의 관중에 의거하여 중원을 평정하고 영토를 확장함과 박학의 사(士)를 초치하려고 건원 18년 여광으로 하여금 서방의 쿠자국을 공략하여 나집삼장을 영입하도록 명령하였다.
여광이전승하여 나집삼장과 함께 양주에 이르렀으나 부견은 이미 죽고 중원이 크게 혼란하다는 소식을 듣고, 궁광이 386년 자립 위주하니, 나집도 이곳에 주하기 15년이었다.
그러나 별로 교학의 깊이를 베풀 길이 없어 세월을 허송하였다.
후진의 요흥은 홍시 3년(401) 경주를 공취하여 장안으로 영입하니 58세의 노령으로 도안 몰후 16년이요, 혜원이 여산에서 교세를 크게 펴고 있던 시대이었다.
요흥은 삼장을 모시고 서명각, 소요원을 역장으로하고, 국왕이 친히 백궁을 거느리고 열석하여 필수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삼장은 장안에 있으면서 역경사업에 종사한지 12년, 홍시 15년에 70세에 입적하였다.
그가 역출한 경전은 <大品般若.대품반야>·<小品般浩.소품반호>·<金測般若.김측반약>·<首辯嚴經.수변엄경>·<維摩經.유마경>·<十注經.십주경> 곧 (十地經.십지경>·<法華經.법화경>·<無量壽經.무양수경> 곧 <阿彌陀經.아미타경>·<焚綢經.분주경>·<禪法要解.선법요해>·<坐諒三昧經.좌양삼매경>·<中論.중론>·<百論.백론>·<十二門論.십이문론>·<大督度論.대독도론>·<十住毘婆沙論.십주비파사론>·<成實論.성실론> 등 35부 348권에 달하였는데 후세의 교학에 영향을 끼친 바가 자못 크다.
그리고 이들 역출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고, 역장이 그대로 강설의 장소이었다.
그리하여 나집에 운집하는 문하 영준이 항상 수천명에 달하였다.
역 출에는 100인, <대품반약경>에는 500인, (유마경)에는 1,200인, <법화경>·<사익경>에는 각각 2,000인이 그 역장에 열석하였다고 하니, 그 성대한 강설의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문하에 3,080인의 달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승조·승예·도생·도융을 관내에 4성이라 하고, 또 여기에 도항·담영(曇影)·혜관·혜엄을 가하여 팔숙상수(八宿上首)라고 한다.
다시 그 중에서 승조·도생이 가장 특출했었다.

<중국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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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3/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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