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다왕조의 불교보호정책

굽다왕조의 불교보호정책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인도
• 참고문헌 : 인도불교사

종래의 인도의 많은 임금들은, 자기가 불교와 바라문교의 어떠한 종교를 신봉하든지간에 이 양 종교를 평등히 보호하는 것이 통례였으므로 굽다왕조의 여러 왕들도 또한 바라문교를 신봉함과 동시에 불교도잘 보호했었다.
그러므로 전타라굽다 2세, 즉 월호2세는 카-카나다보타(Kakanadabota)사에 장원을 기부하고 익호왕은 그의 각문(刻戈)위에 불타의 좌형을 새겨 넣었다.
특히 세친전에 의하면 이 두 왕은 세친을 돈독히 존경 공양했고 동호왕은 모후, 왕비와 같이 열심으로 불교를 신봉했다.
또 굽다왕국의 기원 1백 65년(480년)에 재위한 그 불타굽다도 아마 불교 독신자이었던 것 같다.
그 밖에 불교의 절과 탑을 건립하고 승려에게 금품을 보시한 왕도 적지 않았다.
서역기에 의하면 후에 불교 교학의 근본도량이 되고 인도불교의 총 집중처가 된 나란타사도 실은 굽다왕조의 여러 왕들이 건립한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이 굽다 왕조는 바라문교와 같이 불교를 잘 보호했으므로 바라문교가 부흥 왕성함에도 불구하고, 불교도 더더욱 융성하였다.
이제 법현전에 의하여 당시의 불교상황을 보면, 국왕과 부호들이 절과 탑을 건립하고 전원과 사택의 기부가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승려들은 의식주에 결집함이 없이 항상 송경과 수선을 실행근수하고 상호 왕래하여 영송위문하며 위의범가 온 나라에 대소승의 절들에 있어서 많은 승려들이 거주하게 하되 수백인, 내지수천인이 있게 하였다.
중인도에 있어서는 마가다국, 카시국, 마유라국과 및 승가시(Samkasiya)등의 지방에는 불교가 더욱 융성하여 대소양승이 다같이 행하고, 북인도에 있어서는 오좌(Udyana)와 나위(Rohistan)와 발나(Vanna)와 비다(Bhida)등의 지방에 가장 융성하여 대소승이 한가지로 행하고, 동인도에 있어서는 다마이체지방에 가장 융성하였다.
또 서인도와 남인도는 법습의 여행 중에 들지 않기 때문에 확실치 못하나 법현이 동인도로부터 그후 2세기에 널리 인도를 여행한 현장기사를 참고해 보면 서남인도에서도 대소승이성행한 것 같다.
또 기타 지역에 대해서는 법현전에 의하면 선선, 오위, 자합, 갈차등 지방에 융성하여 대소 양승과 대소 겸학이 행하였으며, 특히 우진국 같은데서는 수만의 승려가 있었는데 그의 대부분은 대승에 속해 있었으며, 국내의 대승사인 구마체선(Gomati)과 같은 절에는 위의 정숙한 3천의 승려가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위와 같이 굽다왕조에 있어서 여러 왕의 원정으로부터 동서의 교통이 열리고, 또 그들이 보호하는 불교는 원근각지역에 널리 흥포되어 크게 불교의 융성기를 형성하였다.
특히 불교적인 사회사업의 하나로서는 국내각처에 시료원(福德醫藥舍)을 설치하여 빈궁고독등 기타 일체병자를 구제하고, 또는 그 다른 각종의 물품을 급여했다고 하며 불교가 이와 같이 융성하는 한편 문화방면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한 예를 들면 월호 2세의 조정에는 유명한 9인의 학자가 있어서 9보라고 칭하였으니 당시 인도 대사전가인 아마라 싱하(Amarasmha)와 대문법가인 바라루치(Vararuci)와 대희곡가인 카-리다-(Karidasa)와 대천문가인 바라하미히라(Varahamihila)등이 그중에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여 문화의 색채가 찬연히 빛나서 인도문명의 최고조에 달하였었다고 한다.

<인도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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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9/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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