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왕의 혼과 김유신의 백

미추왕의 혼과 김유신의 백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한국
• 시대 : 신라
• 지역 : 경상도
• 참고문헌 : 삼국유사 삼국사기

제 13대 미추 임금(未鄒尼叱今)은 김알지의 7세손이다.
대대로 현달(顯達)하였고 또 성덕(聖德)이 있었으므로, 첨해왕(占解王)의 위를 물려받아 비로소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능은 흥륜사(興輪寺) 동쪽에 있다.
제 14대 유례왕(懦禮王)때에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금성(金城)을 와서 쳤다.
신라 편에서는 군사를 많이 동원하여 막았으나, 오랫동안 대적할 수는 없었다.
문득 이상한 군사가 와서 도와주었는데, 모두 대나무 잎을 귀에 꽂고 와서 힘을 합쳐 적군을 쳐부수었다. 적군이 물러간 후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대나무 잎이 미추왕릉(未鄒王陵) 앞에 쌓여있음을 보고. 그제야 선왕이 음으로 도와 나라에 공이 있음을 알고 이로 인하여 죽현릉(竹現陵)이라고 불렀다.

37대 혜공왕(惠恭王)때, 대력(大曆) 14년 기미(779) 4월에 문득 회오리바람이 김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 속에 한사람은 준마를 탔는데, 장군의 모습과 같았으며, 또한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사람 40명가량이 그 뒤를 따라와서,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에 능속에서 마치 진동하며 우는 소리가 나는 듯하고 혹은 호소하는 듯한 소리도 들리었다.
「신은 평생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한 공이 있었으며, 지금은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진호(鎭護)하여 재앙을 제거하고 환란을 구제하는 마음만은 잠시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나간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이는 군신들이 저의 공훈(功熱)을 생각해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신은 다른 곳으로 멀리 옮아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애쓰지 않겠사오니 임금님께서는 이를 허락하소서.」
왕(未鄒王)이 대답했다.
「나의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하겠소.
공은 다시 그전처럼 힘써 주시오.」
김유신이 세 번이나 청해도 왕은 세 번다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이에 돌아갔다.
왕(惠恭王)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대신 김경신(金敬臣)을 보내어 김공(김유신)의 능에 가서 사과하고, 김공을 위하여 공덕보전(功德寶田) 30결(結)을 추선사(熱仙寺)에 내리어 명복을 빌게 했다.
이절은 김공이 평양(고구려)을 처서 평정한 후에 복을 빌기 위해서 세웠기 때문이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더라면 김유신 공의 노여움을 막지 못했을 것이나, 왕이 나라를 진호(鎭護)함이 크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덕을 생각해서3산(山)과 함께 제사지내어 폐지하지 않고서, 서열을 5릉(五陵)의 위에 두어 대묘(大廟)라고 불렀다.

<三國遣事 및 三國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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