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시카왕의 불교사업

카니시카왕의 불교사업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인도
• 참고문헌 : 인도불교사

월씨국 귀상왕조의 제 3세대인 카니시카왕은 서력 2세기 초에 즉위했는데 그 후에 중인도로 진군하여 화씨성을 공락하고 안식국(安息國)과 그 다음 후한(後漢) 영토였던 소륵(疏勒)과 사거(莎車) 등지를 정벌했다.
그래서 왕은 왕도를 건타라국의 포루사 포라성에 정하고 또 카니시카성을 특히 가습미라국에 건설했다. 왕은 이렇게 원정을 행함과 동시에 선정을 국내에 폈다.
그러므로 간타라국은 동서 문화의 교차지가 되어서 특유한 간다라 문명을 산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건축 및 조각 등의 불교적 미술은 역사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은 특히 불교를 독실히 신봉했다고 하니, 전하는 바에 의하면 왕은 서북인도를 평정하고 다시 동방 마갈타에나아가 중천축의 맹주인 화씨를 격파한 후 마침내 배상금으로 화씨왕에게 9억금을 요구하였던바 화씨왕은 9억금 대신 불교학자인 마명보살과 불발(佛沐)과 자심계(慕心鷄)로써 하나에 3억금씩 충당하겠다고 하므로 카니시카왕은 환희하여 이를 승낙했다고 한다.
카니시카왕의 부조시대에는 본시배화외도였는데 왕이 인도에 들어가면서부터 불교로 개종했다고 한다. 전기에 의하면 마명대사를 얻어가진 후 불교에 대한 신앙열이 더욱 고조되 있다고 한다.
그 뒤에는 왕은 다수의 절과 탑을 건립했는데 수도 포루사포라이 건립한 탑은 높이가 40장이나 되어서 그 장엄한 것이 전인도에 제일이었다고 한다.
또는 매일같이 불교의 대덕을 초청하여 청법공양하고 불법을 보호하고 장려했으므로 그 영내에 불교가 크게 유포됨과 동시에 그 여세가 서역지방으로부터 중국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또는 왕의 광대한 영토는 각종의 민족을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불교가 이 민족간에 전포되자 그 영향을 각 방면에 끼치게 되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각 지역에서 불교의 변천발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카니시카 왕은 불교제부파간에 있어서의 경논에 대한 이의를 통일코자 하여 협존자(駱尊者)와 상의한 결과 학식이 학월한 고승 5백인을 선출하여 제 4희 결집사업을 가습미라국 원림사에서 크게 거행했다.
그 결집장에는 세우(世友)를 선두로 하여 협존자, 법구(法球), 각천(覺天)등 유명한 아라한들이 집합하였는데 먼저 경장의 주석인 우파제사찐(Upadesa) 1만송과 율장의 주석인 비나야비파사(Vinava-Vibhasa) 10 만승과 논장의 주석인 아비달마비파사(Abhid-hatma-vidhas3)10만승을 합하여 30만송 6백 60만언의 대주석을 저술하였다.
이렇게 결집을 끝마치고 나서 왕은 이것을 동판에 새겨서 돌함에 넣어 보탑중에 봉안하고, 거기게 호위병을 두어서 탑밖에 유출되는 것과 이학도들의 출입을 절대 엄금했다.
그런데 이중 경율 2장의 주석은 일찍이 산실되었는지 오늘까지 전한 것이 없고 다만 논장의 주석인 아비달마대비파소론(Abhidharmamah3 Vibhass-ssstra) 2백권이 현존할 뿐인데, 그 내용은 대족론을 방의로 하고 가다연리자의 발지론을 세석하여 제부의 이의를 비판회통함과 동시에 유부의 교의를 대성한 것이다.
그런데 이 결집은 오직 북장소전에만 있고 남방소전에는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로부터 뒤에 가습미라는 오래도록 소승유부의근거지가 되어서 북방제국에 그 교를 전했으니 소승교는 대개가 이 가습미라를 기원지로 했다고 본다.
저 중국소전의 소승교가 유독 가습미라의 유부종에만 한한 소이는 전혀 여기에 의한 것이니 이것은 크게 주목되는 점이다.
대체로 카니시카왕은 재위한지 30여년경에 무너졌었는데 그의 사후에도 그의 왕조는 오히려 수대를 계속하여 불교를 신봉하고 사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기 2세기말에 바-수데바(Vasudeva)왕의 말년 또는 그의 사후에 이르러서는 결국 걸이다종(乞利多種) 때문에 왕위를 빼앗기게 되었으니 걸이다종은 맹렬히 배불운동을 행하여 절과 탑을 파괴하고 스님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그때에 도화라국(Juhnara) 설산상왕(Himmalaa)은 석가족 출신으로서 본시 신불자였기 때문에 걸이다종의 왕을 살해하고 불교를 재흥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이 소승불교가 변천하여 내려오다가 서기 제 3세기 즉 불멸 제 8세기에 들어와서는 용수와 제바 등의 제논사가 배출하여 대승불교를 흥융시켰으므로 불교가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대승불교란 것이 돌연히 현출한 것이 아니라 소승으로부터 대승에로 옮기는 과도기에 있어서 대소승 겸학의 새 논사가 많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도불교사>

연관목차

778/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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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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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