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불교와 활불신앙

몽고불교와 활불신앙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기타
• 참고문헌 : 호국불교의 이념과 실체

몽고는 내륙아시아의 동부를 차지하고 동쪽은 흥안령(興安嶺)에서 서쪽은 신강성(新强省)까지 뻗치고, 북쪽은 시베리아, 남쪽은 중국에 인접하는 485만㎢의 광대한 고원의 지역이다.
보통 고비사막을 중심해서 안팎으로 구분되는데, 이남을 내몽고, 이북을 외몽고라고 부른다.
정치적 의미로서는 내몽고는 중공에 편입되어 내몽고 자치구라고 하며, 외몽고는 몽고인민공화국이라는소련의 위성독립국가로 되어 있다.
몽고족에 관한 기록은 이미 당시대의 중국측 자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민족이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3세기 초엽 칭기즈칸에 의해 몽고제국이 형성된 뒤부터다.
몽고 고원에는 당시 몽고계와 터키계의 여러 부족과 씨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몽고족 출신의 칭기즈칸이 제족을 통일하여 내몽고에 세력을 확립하였다.
그는 1206년 대오(大汚)시해까지 계속되어 유럽에까지 몽고군의 용명(勇名)을 날렸다.
세조 시대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남송을 멸망시키고, 전 중국을 지배했다.
원제국은 칭기즈칸이 즉위하고부터 멸망(1367년)할 때까지 162년. 국호를 원으로 바꾼 세조의 즉위부터는 대 109년간 계속되었다. 몽고는 태조때부터 불교를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그의 막료중에서 야율금촌(耶律楚村)과 같은 불승이 있었다.
그러나 몽고정권과 불교의 관계는 태종 때부터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태종은 금을 정벌할 당시 해운인간(海雲印簡 : 1202-1257)을 만나 그를 존경케 되었으며, 인간은 원조를 위해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조의 숭불은 티베트에서 일어나 라마교의 도입으로 더욱 열렬해졌다.
원조의 라마승으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파스파(八思巴 : 1239~1280)이다.
그는 티베트 라마교사키 야파의 승려로서, 세조 (쿠빌라이칸)의 신임을 받아 국사가 되고, 티베트 및 구서하령의 일반 행정권과 원 제국내의 전 불교계를 통섭했다.
그는 또 티베트문자를 기초로 하여 몽고의 새 문자(파스파문자)를 만들고 1270년 그 공으로 제사(帝師)가 되었다.
제사란 황제의 스승이란 뜻으로 역대의 황제에게 계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제사에 직속한 기관으로는 선정원(처음에는 統制院)이라는 관부가 설치되어, 원과 티베트불교에 관한 모든 사항을 처리했다.
파스파는 나중에 티베트로 돌아가 1280년 죽었는데,
세조는 그에게
「皇天之下一人之土宣文輔治大聖臺德普覺眞智佑國如意 大寶法王西天佛子大元帝師」
황천지하일인지토선문보치대성대덕보각진지우국여의 대보법왕서천불자대원제사
라는 어마어마한 호를 하사했다.
원이 이처럼 라마승을 존경를 받드는 것으로써 몽고정권의 독자성을 보이고, 아울러 티베트 통치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종교 그 자체에도 원인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몽고민족의 고유 신앙은 샤머니즘 이었는데, 라마교는 화려한 의식과 신비로운 기도를 가지고 있어서 이러한 분위기는 단순 소박한 그들에게 큰 매력이었던 것이다.
파스파가 죽자, 수년 후부터 원 제국 각지에는 제사사(帝師寺)가 건립되고, 파스파의상이 모셔졌다.
제사의 지위는 더욱 존엄해졌고, 제사의 명령은 조칙(詔勅)과 동등한 권위를 가졌다.
심지어는「라마승을 때리는 자는 그의 손을 자르고 또 그들을 욕하는 자는 혀를 자른다.」
고 하는 명령까지 내렸다.
원이 이처럼 도에 지나친 태도는 라마승을 차츰 횡포하고 타락케 하여 그들로 하여금 더 할 수 없이 나쁜 짓을 하게 만들었다.
이는 마침내 한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원제국의 멸망을 초래케 하는 원인이 됐다.
유럽에까지 영토를 확대했던 원제국은 부족내의 다툼이 원인이 돼, 1968년 멸망했다.
중원은 명이 들어서 몽고족을 축출했으며, 그들은 다시 몽고고원으로 도망쳐야 했다.
원대에 극성하던 몽고의 라마교는 그후 쇠퇴의 길을 보였다.
그러나 몽고 고원으로 도망가 독립을 유지하던 북원의 알탄칸의 청해를 원정하자 이곳에서 라마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1573년부터 청해에서 사원건립이 시작되었다.
1578년에는 티베트의 법왕 제 3대달라이라마인 소남 감초가 추천돼 성대한 법회를 배풀었다.
잇달아 칸(汚)의 거족인 귀화성에 홍자사(弘慕寺)가 세워져, 라마교는 내외몽고뿐만 아니라 오이라트족 사이에도 급속하게 퍼져 차하르의 투멘칸을 비롯하여 외몽고의 여러 칸들까지도 달라이라마에게 참설(參設)하게 됐다.
알탄의 증손 후드크투가 제 4대 달라이라마가 된 것도 라마교 흥륭의 한 현상이다.
달라이라마의 (달라이)란 명칭은 티베트어로 대해를 뜻하는 링초(rgyamtsho)를 몽고어로 바꾸어 말하는 것이다.
1632년 명태종은 계속 중원을 넘보는 내몽고를 복속시켰으나, 외몽고는 여전히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 후 호이라트의 후 예중가르부가 강대해져, 외몽고·청해·티베트·동터키스탄 등지를 점유하여 다시 강대해진 이들은 청을 침공하다가 도리어 패배하여 청의 지배를 받게 됐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고는 러시아의 힘을 빌어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치를 선언하고, 다음 해에 러시아와 로몽조약을 체결했으나 중국측의 반대로 폐기되고, 1915년 로·몽·중 3국간에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중국은 외몽고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은 회복되었지만, 외몽고는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21년 몽고인민혁명당의 수흐바토르·초이발산 등이 혁명을 일으켜 몽고불교의活佛 보크드 게겐을 원수로 하는 입헌군주국을 세웠다.
보크드는 라마교의 법왕으로 티베트에서와 같이 정교양권을 장악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나이가 많아 1924년 죽고 말았다.
명목상 원수이던 보크드가 죽자, 소련의 무력을 배경으로 한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몽고인민공화국의 면적은 전체몽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56만 5천 ㎢, 인구는 155만 5천 명이다.
전체인구의 80%이상이 라마교도이다.
한 집안에 남자 아이가 많을 때는 그중 한 두명을 출가시키는 것이 풍습이다.
전국 곳곳에는 라마청이 있어서 주민들의 신앙을 지도한다.
라마청은 몽고족들의 전통적인 가옥인 이동하기 편리한 소규모의 파오(包)와는 달리 대규모 종교정책으로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혁명초기 공산주의자들은 숱한 불교사원을 파괴했으며, 승려를 투옥 살해했다.

<호국불교의 이념과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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