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왕의 불행한 운명

궁예왕의 불행한 운명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한국
• 시대 : 고려
• 참고문헌 : 청룡사사지

고려의 창건한 역사를 자세히 알아보려면 궁예왕에 대한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청룡사 제1세 주지 혜원비구니가 태백산 세달사(世達寺)에서 허담화상을 모시고 있을 때에 궁예도 허담화상을 모시고 그의 상좌로 출가하였으므로 혜원비구니와 궁예는 불문으로 법 형제간이었다.
궁예왕은 세달사에 있을 때에 그의 법형인 혜원비구니의 극진한 애호를 받았으므로 후일 궁예가 철원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을 때에 혜원비구니를 청하여 철원 화개산 도피안사에 머무르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궁중에 출입하다가 궁예왕의 왕비 난영의 소개로 왕건과 친하게 되고, 또 왕건이 고려의 태조가 된 후에 청룡사를 창건하고 혜원비구니를 초대주지로 주석케 한 것 등이 모두 궁예왕을 인연하여 생겨진 일이므로 여기에서 궁예왕에 대한 간단한 역사를 적어두지 않을 수 없다.
궁예왕은 신라 제 48대 경문왕(景文王) 5년(서기 865년) 5월 5일에 경문왕의 왕자로 태어났다.
원래 경문왕은 신라 제 47대 헌안왕(憲安王)의 부마(駙馬 사위)로써 이름은 응렴(應廉)이었다.
응렴이 부마가 되기 전에 국선(國仙 :花郎)으로 있으면서 공부하러 다닐 때에, 어느 날 설형이라는 친
구의 집에 갔다가 설형의 누이 설처녀를 본 일이 있었다.
응렴은 그 처녀를 한번 보고 마음에 사랑을 느끼고 그 처녀를 몹시 그리워하였다.
그런데 한편 헌안대왕은 딸 형제만 있고 아들은 없었다.
맏딸 이름은 영화공주, 둘째 딸 이름은 정화공주였다.
어느 날 임해전 잔치에서 응렴은 헌안왕의 눈에 들게 되어 맏딸 영화공주와 인연을 지어 부마가 되었다.
헌안왕은 재위 4년 만에 승하하고 후사(後嗣)가 없으므로 맏사위 응렴이 대통(大統)을 이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으니, 이분이 바로 궁예왕 아버지 경문왕인 것이다.
경문왕은 16세 되던 해에 헌안왕을 이어신라 제 48대의 왕위에 나아가고, 왕이 되어 2년이 지난 18세가 되던 해에는 영화공주의 친동생 정화공주(처제)를 둘째 왕비로 삼고, 또 그 다음해 19세 때에는 옛날 사모하던 설형의 누이 설처녀를 제 3왕비로 맞이하였다.
경문왕은 여러 왕비를 모두 사랑하였으나 특히 새로 맞이한 제 3왕비인 설왕후를 지극히 사량하였다.
설왕후는 왕비된 다음 해 즉, 경문왕이 즉위한 지 5년이 되던 해에 왕자를 낳으니 이 왕자가 용덕왕자 곧 후일의 궁예왕인 것이다.
용덕왕자가 탄생하자 경문왕의 설왕후에 대한 사랑은 더욱 깊어갔다.
경문왕의 설왕후와 용덕왕자에 대한 사랑이 깊어가면 깊어 갈수록 제 1왕후 영화와 제 2왕후 정화의 질투는 불 같이 더해 갔다.
마침내 제 1왕후와 제 2왕후는 설왕후 즉, 제 3왕후를 모해하기 시작하였다.
즉「용덕왕자는 경문왕의 아들이 아니고, 이손(伊凌 :二品)벼슬로 있는 윤흥(允興)의 자식이다」라고 소문을 퍼뜨리고, 또 한편 대나마(大奈默 : 十品)벼슬로 있는 일관(日官)간성이라는 신하를 꾀어 천문과 관상을 보니 용덕왕자가 이손 용흥의 모습을 닮았을 뿐만 아니라, 용덕왕자의 등에 왕자골(王子음)이라는 뼈가 있는데, 이 뼈가 잘못 생겨 장차 부왕을 죽이고 나라를 망하게 만들 흉악한 뼈라고 경문왕에게 모함하게 하였다.
경문왕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풍문으로 마음이 심히 산란하던 즈음인데, 마침내 왕자신이 가장 신임하고 있는 일관 간성의 간곡한 말을 곧이듣게 되어 용덕왕자를 죽이기로 결심하여 신하를 불러 용덕왕자를 연못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 설 왕후는 뒤 대궐에 거처하였으므로 뒤대궐마마라고 불렀다.
뒤대궐마마는 왕의 명을 듣고 억울함과 원통함을 금할 길이 없어 왕에게 눈물로 간절히 하소연하였으나 일은 이미 기울어져 모두 소용이 없었다.
하소연하다 지친 설왕후는 마침내 비장한 결심을 하고 용덕왕자를「청화지」라는 연못에 던지고 자신은 연못가에 있는 청련각(靑蓮閣)이라는 누각에 올라가 칼을 물고 거꾸로 떨어져 자살하였다.
용덕왕자는 모후인 뒤대궐마마가 연못에 던질 때 유모(乳母)가 연못가에 숨어 있다가 떨어지는 아기를 받아 안고 도망갔다.
유모가 떨어지는 아기를 받을 때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한쪽 눈을 찔러 용덕왕자는 애꾸가 되었다.
그 후 용덕왕자는 유모의 손에 의하여 살아나 먼 시골로 가서 길러져 15세가 되던 해에 태백산 세달사에 들어가 허담화상의 상좌가 되고 불명(佛名)을 선종(善宗)이라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난 뒤에 허담스님은 선종에게 태허(太虛)라는 법호(法號)를 지어 주었다.
용덕왕자는 세달사에 있을 때에 법형제가되는 혜원비구니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고 사제(師弟)되는 소허 (小虛)와 의좋게 지냈다.
소허는 후일 후백제의 국왕인 견훤이었다.
태허스님은 27세때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5년(서기 891년)에 절을 등지고 북원(北原)의 적 (賊) 기훤(箕萱)의 부하가 되었다가, 곧 양길의 휘하에 들어가서 양길과 합세하여 신라의 북쪽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양길의 딸 난영과 결혼하여 양길의 사위가 되었다.
이로부터 3년 후인 신라 진성여왕 8년에 명주(溟州 江陵)·철원(鐵圓 鐵原)을 함락한 후 독립하여 장군을 자칭하였고, 이듬해 강원도 일대를 장악하여 나라의 규모를 갖추었다.
그리고 송악(松嶽 :開城)의 왕건을 태수로 임명하고, 신라 제 52대 효공왕(孝恭王) 2년에는 송악에 웅거하여 평안도와 한산주(漢山州)의 30여성을 공략하였다.
이듬 해 효공왕 3년엔 왕건을 보내어 양길의 군사를 격파하였고, 또 그 다음해 (효공왕 4년)엔 국원(國原 忠州)과 청주(淸州 溫陽)등을 함락하였다.
그리고 효공왕 5년에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 고구려라 칭하고 공언(公言)하되,
「옛날 신라가 당의 힘을 빌어 고구려를 멸하였은즉 내 반드시 그 원수를 갚으리라.」
하고, 서북방의 인심을 거두려 하였으며, 한편 왕건에게 금성(錦城:羅州)을 치게 하여 견훤을 견제하였다. 효공왕 8년에 궁예는 국호를 고치어 마진(痲疹)이라 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서울을 송악에서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그 후 6년(서기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하였다.
그러나 궁예왕은 자기의 능력을 과신하여 부하들을 잘 거느리지 못하고 옛 불제자 됨을 망각하고 자칭 미륵부처님이라 하다가 신라 제 54대 경명왕 2년(서기 918년) 6월에 54세를 일기로 파란과 한 많은 일생을 마침에 왕위마저 쫓겨나서 부양(平康)땅 삼방고개 밀에서 마쳤다.
여기서 궁예의 생애를 다시 한번 돌이켜보면, 왕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궁중 음모에 희생이 되어 애꾸눈이 된 사실과, 도적떼로서 머리를 쳐들었던 자신의 경력과, 정치이념이 결여된 단순한 성격은 오직 신라의 전통적 힘에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만 만족하였고, 장군의 자격은 있었으나 왕자로서의 정치 능력을 못 가졌던 것이 그의 비극의 근본적인 씨가 되어 일생을 바쳐 신라 잔재세력에 치명상을 주고 혼란시기의 각지 도적떼를 소탕함으로써 왕건의 고려 개국의 토대를 닦아준 결과가 되었다.
<靑龍寺寺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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