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쇼카왕의 정법정치

아쇼카왕의 정법정치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인도
• 참고문헌 : 불교설화대사전

서기전 4세기 말 희랍 알렉산더 대왕이 서인도를 교란함으로써 공작왕조의 초조인 전타라굴다왕이 일어나서 희랍의 세력을 물리치고 동시에 중인도 마갈다국의 왕위를 빼앗고, 다시 4방을 두루 정복한 결과 중·북·서의 3인도를 통일하여 일대제국을 건설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빈두사라왕이 그 부왕의 대업을 계승하여 국내를 통치하고 희랍 애급 등의 각국과 서로 교재를 맺고 동서 문명을 합유하여 문화적으로 많은 발달을 보았다.
아쇼카왕은 공작왕조의 제 3대로서 전타라굴다왕의 손자요, 빈두사라왕의 아들이다.
아쇼카왕은 즉위한지 9년에 전인도를 확실히 통일하기 위하여 남방의 강국인 칼링카(kalinga)국을 정벌하게 되었는데 그때 자그만치 10만이나 되는 전사자와 15만의포로 그리고 수많은 기아 병사자를 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왕은 전쟁에 그 전화의 참혹함을 크게 뉘우쳐 슬퍼함과 동시에 따뜻한 부처님의 자비문으로 귀의하여 다시는 전쟁을 행하지 않겠다고 결의하였다.
또 왕은 즉위직전에 왕의 형인 화수마를 대신들과 협력하여 죽였다고 하니, 만약 그렇다면 일가족간의 골육상쟁의 역사까지 있은 듯하다.
왕은 이러한 것이 모두 참회의 종자가 되어 신불하게 된 것이다.
왕의 신앙은 그 뒤로부터 더욱 깊게 되어 즉위 11년에는 수계신남(受戒信男)이 되어서 바른 지혜를 얻고 즉위 12년경부터는 자주 자주 칙령을 내려 불교의 자비와 인애를 정치상에 실현하여 사형죄수를 석방하고 살생을 금하여 스스로 수령을 폐지하고 국민의 진상을 감하게 했다.
그리고 왕자 마힌다(Mahinda)와 왕녀 승가밀다를 출가시켜서 불법을 수확하여 널리 전도케 하고, 또 친히 여러 대덕고승을 초청하여 법을 듣고 많은 스님들에게 대 공양을 베풀었다.
또 즉위 13년에는 정법대관을 각지에 보내고, 18년에는 화씨성에서 제 3회 보전결집을 행하고, 그 이듬해에는 각국에 전도사를 파견하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왕이 스스로 불적을 순례하여 성지마다 기념비를 세우고 수많은 절과 탑을 건립하는 등 호법적 사업과 자선사업을 많이 행하여 일의전심으로 정법선포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정치를 황족과 대신들에게 맡기고 스스로 왕궁안에 은거하여 수도적 생활을 하면서 70세까지의 여생을 보냈다.
특히 왕의 보호하에 행한 불전결집에 대하여 말하면, 남전에는 불멸 후 2백년대에 이르러 제3회 결집이 아쇼카왕시에 행하여졌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북전에는 이것이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양전에 전하는 내용 중에는 다같이 상호 관련된 사실이 있으므로 제 3회 결집이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제 3결집은 제 1 제 2결집의 경우와 같이 불교도 전반의 대표가 모여서 결집한 것이 아니고 북전에 이 사실이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단 몇파의 부파불교 사이에서만 행한 것이 아닌가 느껴진다.
그런데 제 3결집의 특색은 제 1 제 2의 결집과 같은 불타의 인격중심인 계율주의에서 한걸음 나아가 교의중(敎意中)에서 불타를 구하려는 불신과 수도관의 적극적견해가 부연되어 부파분열의 감상을 지어준 것 같다.
어쨌든 이러한 아쇼카왕의 불교보호사업과 그의 전도사업은 여러가지 면에서 그 공적이 현저하므로 사가들은 왕을 기독교의 콘스탄틴 대제에 비하는데 왕은 실로 저 대제보다도 우월한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제 화씨성에서 제 3회의 불전결집이 있게 된 사유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아쇼카왕은 불교를 독신하여 많은 절과 탑(8만 4천의 사탑)을 건립하고, 매일 같이 다수의 스님들에게 공양재를 베풀기 때문에 승니수가 부쩍 늘어 화씨성 계원사와 같은 절에는 6만명의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외도의 무리들은 왕의 공양을 받기위하여 스님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스님들 가운데 섞여 있어서 범성이 잡거하여 진위를 가리기 어려웠고 스님들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분쟁이 그치지 않아 포살을 행하지 못함이 7년에 미쳤다.
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화합을 권유했으나 듣지 않기 때문에 스님들을 참살한 일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목건련자제수라고 부르는 왕의 동생이 출가하여 고승대덕으로 있었는데 그도 이 분쟁을 꺼려하여 마유라국 부근의 아호항산에 있었다.
왕은 특사를 보내어 그를 청하고 교조의 좌정과 스님들의 화합을 도모하라고 위촉하였다.
제수는 왕명을 받들어 스님들 가운데서 1천명을 선출한 후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어서 불전결집을 행하였으니 때는 왕의 즉위 18년이었으며, 9개월에 걸쳐서 이 제 3회 결집을 종료하였다.
이와 같이 결집한 내용을 보건대 경·률·논 3장 전반에 걸쳐 결집을 행하고 또 제수는 자신의 불교의 논점을 들어서 이것을 설명하여 논사(論事)를 제작했다고 한다.
단 이 제 3회 결집은 남방불교에만 전할뿐이요, 북방불교에는 전한 일이 없으며, 또는 결집내용도 분명치 않기 때문에 혹은 이르되 논부에 속한 것만 편집했을 뿐이고 불설에 대한 결집은 없었다고 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 3회 결집도 제 2회 결집과 같은 불설결집의 설명은 제 1결집에 미루고 다만 그 특질만을 들었다고 보는 것이 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외가 잡거하고 범성이 혼채하여 분쟁을 계속했기 때문에 계법의 문란은 말할 것도 없으며 정리하기 위하여 제 3회 결집이 있게 된 것인즉 단지편집만 그쳤다고는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아쇼카왕의 허다한 치적 가운데 불교를 위하여 공헌한 사업으로 특필할 것은 불전결집과, 또는 포교 전도에 대한 정법대관 파견과 전도사 파송이라 하겠다.

전술한 바와 같이 왕은 칼링카를 정벌한 후 무력에 의한 승리가 너무 비참한 데 반하여 진정의 승리는 달마 즉 정법에 의한 승리에 있다는 것을 통감하고 이 정법의 승리를 실현키 위하여 화씨성 불전 결집이 있기 전, 즉위 제 13년에 인도 각지에 정법대관을 파견하여 인류의 행복과 주민의 안녕을 보장했던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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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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