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불교와 혜원의 민중불교

통합불교와 혜원의 민중불교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한국
• 참고문헌 : 동양불교사

이상 4국 이외에 다시 북방불교에 대하여 주의할 것은 돈황(감숙성)은 서람이 도읍한 곳으로서 서역과 중국과의 관문에 위치하여 교통의 요로에 해당하는 자못 중요한 지방이다.
여기에는 불교도 일찍 전하여졌으며 불교 사원도 건립되었다.
돈황보살이라고 지칭된 서진의 축법호를 위시하여서 진으로부터 동진에 이르기까지 많은 명승을 배출한 곳이다.
또한 저 유명한 돈황의 석굴 천불동은 전진이 건원 2년(366) 사문 악전에 의하여 개착되어 법랑선사 및 칙사 건평공·동양왕등에 의하여 계속 개착되었다.
이 곳은 운강·용문과 함께 세계에 제일가는 명굴이다. 이 석굴로부터 많은 사료도 취급되고 있다.
불교 관계의 것도 많이 나와서 돈황불교가 성황했던 것도 알 수 있다.
서진(西晋)이 서북 이민국에게 망하자, 한민족이 북방으로부터 남하하여 동진(東晋)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한 문명이 수입되어 강남의 문명이 건설할 기초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동진은 황하의 문화가 남하하여 양자강 이남의 문화를 개척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물론 지금까지 오의 문화가 있기는 하나 북방문화에 대하여 남방문화를 건설한 것은 동진시대부터이다. 동진의 불교에 있어서도 북방의 불교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를 대표하여 후세에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많다.
혜원·불타발타라(각현)·법현을 위시하여 지둔·축잠·시리밀다라 등이 그들이다.
특히 혜원은 여산에 있어서 당시 북방남북 거성이었다.
혜원은 안문인으로 본성은 가씨, 어려서 유학·노장학을 수하고, 20세 시에 도안이 태평의 항산에서 학도를 교육한다는 말을 듣고, 거기가 종사하였으며, 후에 (반야경)의 강연에 참여하여 활연대오하였다.
처음 매씨 혜지와 함께 출가하여 20여년간 도안에게 사사하니, 도안이 그 영재를 인정하여 항상, 사도유동국기재원호(使道流東國其在遠乎)라고 하였다 하니, 그가 영재임을 알 수 있으며 해행이 원만하여 과연 학도의 영도가 될 만하였다.
도안이 양양에 이주할 때 혜원도 수행하였고, 도안이 장안에 영입됨에 사자상분하여 도안은 북으로 혜원은 남으로 향하여 제자 수10인과 함께 형주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부산에 나아가려던 도중, 심양에 와서 여산의 승경을 요망하고 등산의 정을 금할 수없어 드디어 산에 올랐다.
그런데 이 때 동문인 혜영등이 먼저 와서 있었으므로 구교의 혜원을 만류할 뿐만 아니라, 혜원 또한 여산을 애호하여 영주할 곳으로 정하고 혜영거지의 서림사 동쪽에 절을 짓고 동림사라하였다.
혜원이 여산에 주하게 됨에 도의 뜻이 있는 자가, 도속을 막론하고 그 고풍을 사모하여 사방으로부터 운집하니, 여산은 남방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여산에 들어가 34년간 한번도 하산하지 않았고, 내객이 있어 전송할 때에도 호계로써 경계를 삼았고. 덕행이 고결하여 일세를 감복케 하였다. 동진의희 14년(416) 83세로서 입적하였다.

혜원이 교학상에 끼친 공적을 들면

① 당시는 옛반상주의 법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혜원은「佛題至極(불제지극) 至極則無變(지극칙무변) 無變之理(무변지리) 登有窮耶(등유궁야)」라 하며 (법성론)을 지어 지극히 무변함을 논하였다.
라집삼장이 이논을 보고,「登火妙載(등화묘재)」이리오 라고 찬란하였다.
그 때 (대지도론)을 역출하니, 요흥이 그 서문을 명하나 감히 응하는 자가없어 멀리 혜원에게 글을 보내 질문을 청하니 사가 그 서문을 짓고, 또 (대지도론) 20권을 지어 학자를 계발하니 사가 얼마나 불교의 뜻에 깊이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② 혜원의 공적으로서 특필할 것은 백연사이다.
혜원이 여산에 거주할 때 당시 지명의 유자·도사·유덕의 고승이 육면하여 사문에 기지하였다.
동림사의 백연지방에 방사를 결구하여 아미타불의 존상을 안치하고 염불회를 열으니, 이 집회를 백연사라하고, 128명중 지명의 18명을 여산의 18현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신앙으로써 모인 결사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미중유의 성사로서 당시 일반인은 청담공론에 압증이 나서 실제적인 신앙을 구하고, 도솔왕생의 사상, 나아가 서방왕생의 사상이 되었다.
(무량수경)을 번역하기 6회를 거듭하고, (반야삼매경) 등의 제경에서 아미타불을 찬탄하였으며 도안이 (정토론)을 지어 미타의 사상을 고취함에 정토신앙은 아주 원숙해졌으며, 이것이 혜원에 이르러 순연한 신앙중심의 결사가 된 것이다.
원·명시대에 이르러서도 민간신앙으로서 운선히 이어 내려와 중국 정사교의 기초를 열었다.
이 정사교의 단체는 연면히 불교교단 발전의 일형체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까지도 혜원의 유풍이 상존하여 여산류의 염불이라 하고, 염불과 선과의 일치함을 종지로 하였으므로 담란 도작·선도류의 정토교와는 다소 상이점이 있다.
그러나 중국정토교의 창시자로서 후세 정토교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삼학균수한 수행을 중시한 것은 해원불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혜원은 삼학의 실수에 의하여 자금 몸은 가지기 극히 엄숙하여 속계와 멀리하고 권문에 아부하지 않았다. 으로서 그 풍격을 알 것이니, 동진 성제 시 수영이란 사람이 정사에 참여하여 사문도 왕자를 병예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실행이 못되고, 안제 시에 상현이한 사람이 경왕론을 창함에 혜원이 이를 듣고, 가사는 조종의 옷이 아니며 발우는 묘당의 그릇이 아니다.
사문은 진외의 인으로서 왕자에게 경을 치하지 않는다는 등 4편을 지었다.
이것으로써 혜원의 초속탈진의 도를 알 수 있다.

<동양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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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4/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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