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장수의 깨달음

종이장수의 깨달음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보은설화

• 주제 : 견성
• 국가 : 한국
• 시대 : 조선
• 지역 : 전라도
• 참고문헌 : 한국사찰전서

조선조 중엽, 지금의 해남 대흥사 산내 암자인 진불암에는 70여명의 스님들이 참선 정진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조실 스님께서 안거 결제 법어를 하고 있는데 마침 창호지 장수가 종이를 팔려고 절에 왔다. 대중 스님들이 모두 법당에서 법문을 듣고 있었으므로 종이장수 최씨는 누구한테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돌아갈 수 없고 해서 최씨는 법당 안을 기웃거리다 법문하시는 조실스님의 풍채에 반해 자기도 모르게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맨 뒷쪽에 앉아 법문을 다 들은 최씨는 그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거룩한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대중 스님들의 경건한 모습이며 법당 안의 장엄한 분위기가 최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도 출가하여 스님이 될 수 있으면 오죽 좋을까.」
내심 생각에 잠겼던 최씨는 결심을 한 듯 법회가 끝나자 용기를 내어 조실스님을 찾아갔다.
『스님, 저는 떠돌아다니며 종이를 파는 최 창호라 하옵니다.
오늘 이곳에 들렸다가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현듯 저도 입산수도하고픈 생각이 들어
스님을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조실스님은 최씨를 바라만 볼 뿐 말이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창호지 장수 주제에 종이나 팔면서 살 것이지 스님은 무슨 스님, 불쑥 찾아든 내가 잘못이지.』
가슴을 조이며 조실스님의 답을 기다리던 최씨는 마음을 고쳐먹고 일어서려 했다.
이때였다.
『게 앉거라. 간밤 꿈에 부처님께서 큰 발우하나를 내게 주셨는데 자네가 올려고 그랬구나.
지금은 비록 창호지 장사지만 자네는 전생부터 불연히 지중하니 열심히 공부해서 큰 도를 이루도록 해라.』
최씨를 법기라고 생각한 조실스님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아주었다.
최 행자는 그날부터 물을 긷고 나무를 하는 등 후원 일을 거들면서 염불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후원일과는 달리 염불은 통 외우지를 못했다.
외우고 뒤돌아서 잊어버리고 또 외워도 그때뿐이었다.
대중들은 그를「바보」라고 수군대며 놀려했다.
최 행자는 꾹 참고 노력에 노력을 해왔으나 허사였다.

입산한 지 반년이 지났으나 그는 천수경도 못 외웠고, 수계도 못 받았다.
그는 자신의 우둔함을 탓하면서 그만 하산하기로 결심하고 조실스님께 인사드리러갔다.
『스님, 저는 아무래도 절집과 인연이 없나 봅니다.
반년이 지나도록 염불 한줄 외우지를 못하니 다시 마을로 내려가 종이 장사나 하겠습니다.』
최행자의 심각한 이야기를 다 들은 조실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너무 심려치 말고 공부를 계속 하거라.
옛날 부처님 당시에는 너 같은 수행자가 있었는데 열심히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었느니라.』
조실스님은 옛날 인도에서 부처님을 찾아가 수행하던「판타카」형제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최 행자를 위로했다.

형과 함께 출가한 판타카는 아무리 부처님께서 법문을 설하셔도 기억하질 못했다.
마침내 그는 대중 스님들로부터 바보라고 놀림을 받게 된다.
판타카는 울면서 부처님 곁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판타카야, 내 말을 기억하거나 외우는 일은 그렇게 소중한 일이 못된다.
오늘부터 너는 절 뜰을 말끔히 쓸고 대중 스님들이 탁발에서 돌아오면 발을 깨끗이 닦아 주거라.
이처럼 매일 쓸고 닦으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니라.』
부처님께서는 판타카에게
『쓸고 닦으라.』
고 일러주셨다.

판타카는 그날부터 정사의 뜰을 쓸고 스님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판타카가 잊고 있으면 대중스님들은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 와서 거만스럽고 비양거리는 말투로
『쓸고 닦아라.」
하면서 더러운 발을 내밀었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아침. 판타카는 마당을 쓸던 빗자루를 땅바닥에 홱 내던지면서 크게 소리쳤다.
『알았다. 알았어.』
그는 뛸 듯이 기뻐하며 단숨에 부처님 앞에 나아갔다.
『부처님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뭘 알았단 말이냐?』
『부처님께서 제게 쓸고 닦으라신 말씀은 매일 같이 저의 업장을 쓸고 마음을 닦으라는 뜻이었지요.」
『오! 판타카야 참으로 장하구나.』
부처님께서는 그길로 큰 북을 울리셨다.
대중이 한자리에 모이자 부처님은 기쁨에 찬 목소리로
『판타카는 깨달았다. 판타카는 깨달았다』
고 말씀하셨다.

조실스님의 이야기를 다 들은 최 행자는「판타카」와 같은 수행인이 되기로 마음을 다졌다.
그는 후원 일을 도맡아 하면서 언제나 천수경을 읽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밖에서 환한 불빛이 조실스님 눈에 비쳤다.
이상스럽게 생각하고 문을 열어 보니 최 행자 방에서 방광이 일고 있었다.
조실스님은 감격스러웠다.
최 행자는 곤하게 잠들어 있는데 그가 읽던 천수경에서 경이로운 빛이 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날 또 이변이 일어났다.
글 한 줄을 못 외우던 최 행자가 천수경 뿐 아니라 무슨 경이든 한번만 보면 줄줄 외워 나갔다.

이 스님이 후일 대흥사 13대 주지의 한분인 범해 각안 스님이다.
유명한 저서로「동해열전」이 있다.
조실스님은 선대 스님들로부터 들어온「진불암」창건 유래를 생각하며 또 한분의 진불이 출현했다고 생각했다.
진불암을 처음 창건하게 된 동기는 옛날 남인도에서 불상과 16나한상 그리고 금강경과 법화경 등을 모시고 온 배가 전라도 강진땅 백도부근에 도착한 데서 비롯했다.
영조 스님 일행이 명당지를 찾아 인도부처님을 봉안하던 날 밤. 스님은 꿈에 한 노인으로부터
『이곳은 후세에 진불이 출현할 가람이니라.』
는 계시를 받고 절 이름을 진불암이라 명명했다.

<한국사찰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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