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스님과 허주스님

영산스님과 허주스님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자재설화

• 주제 : 자재
• 국가 : 한국
• 시대 : 조선
• 지역 : 전라도
• 참고문헌 : 고승전

영산스님은 전라북도 선운사(禪雲寺)출신이요, 허주스님은 전라남도 송광사(松廣寺)출신이다.
영산스님은 선(禪)을 즐겼고 허주스님은 강(講)을 좋아하였다.
서로가 한 골의 장(將)이 되어 수많은 학졸(學卒)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전라도의 쌍죽(說竹)으로 이름이 높았다.
옛날 공자님과 온백설이 같은 고을에서 같은 숫자와 제자를 거느린 교육자이면서, 서로 만나보지 못하여 애타듯 언젠가 한번 만나서 마음에 회포를 풀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좀체로 되지 아니하였다. 영산스님이 노래를 부르면서 선운사를 떠났다.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이요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라
비아이수(非我而誰)로
다산하조작반(山霞朝作飯)하고
나월야위등(羅月夜爲燈)하니
지아이언(指我而言)이로다.

천하가 태평한 봄이라
사방에 할일이 없네.
이것이 누구인가?
바로 나로다
산안개로 아침을 지어먹고
넝쿨 속 달로 등불을 삼으니
이것이 바로 나를 가리켜 하는 말이로다.

그런데 그 사이에 허주스님도 송광사를 떠나 어디론가 정처 없이 길을 걸고 있었다.

사고무여친(四顧無與親)이요
육방무여소(六方無與疎)라
보보무유영(步步無遺彩)이요
행행진허주(行行眞虛舟)로다

사방을 돌아보아도 친한이 없고
육방을 살펴보아도 석은 이 없네
걸음걸이마다 그림자 남기지 않아
가는 곳마다 빈 배로다.

이 얼마나 멋있는 시인가.
작대기 끝에다가 바랑하나 걸머지고 산 고개 물구비를 떠돌고 건너가는 모습은 어쩌면 김삿갓의 할아버지 정도는 되어 보였다가다 가다 발길이 닿은 곳이 전주 어느 곳 절이었다.
마침 49재가 들어서 큰 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평상시 모시고 싶어도 모실 수 없었던 큰 스님 두 분이 한 시간에 한곳에 도착되었으니 이 얼마나 경사인가.
재자가 법문을 청하였다.
「우리 어머니를 위하며 법문 한번 해 주십시오.」
아무 말 없이 영산이 먼저 올라갔다.
한참동안 영단을 향해 묵념을 하고 있다가,

옛 사람도 이렇게 갔고
고인여시거(古人如是去)
오늘 사람도 이렇게 갔도다.
금인여시거(今人如是去)

하고 내려온다.
다음 허주스님이 올라가셔서는 말 한마디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하고 내려왔다.
재자가 물었다.
「스님, 법을 한마디 해 주시라니까요?」
허주 스님은 돌아서서 선 그대로 말하였다.

미래 사람도 이렇게 갈 것이로다.
미인여시거(未人如是去)

너무도 싱거운 법문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여 보면 이렇게 안가고 또 달리 가는 법이 있을 것인가.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이리 궁글 저리 궁글 하다가,
「이 스님들이야말로 멋쟁이 스님들이로다.」
하고 재자는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작은 소반위에 백지로 싸서 그들 문 앞에다가 갖다 놓았다.
그런데 영산스님은 그냥 가고 허주스님은그 돈을 가지고 가셨다.
「영산이야말로 대도인이다. 물욕이 없으니―」
하고 크게 칭찬하였다.
그런데, 그날 오후 재를 다 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보니 허주스님이 덕산교 다리 밑에서 거지들과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다.
호박, 감자를 사다가 푸짐한 찌개를 하고 하얀 팥밥을 큰 쟁반위에 가득 놓고 포식을 하고 있는 폼은 달나라 가서도 구경할 수 없는 멋진 풍경이었다.
「허주스님이야말로 진짜 도인이구먼―」
하고 재자들은 백배 사례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한편 영산은 주척주척 걸어내려간 것이 동래온천까지 가버렸다.
범어사에 이르러 가난한 식객 노릇을 하고 있는데 마침 그 고을 순찰사 조(趙)엄 이 초임(初臨)하여 있었다.
영산스님이 오셨다 하니 한번 뵙고 싶었다.
관내 기생들을 모으고 대 잔치를 벌이는 가운데 이 스님을 초청하였다.
높은 자리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고 아녀자들을 양쪽에 끼고 있다가 영산스님이 들어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좌정하였다.

영산이 들어오면서,
「영시영산영(影是影山影)이여」
하니, 조엄은
「산시영산산(山是影山 山)이로다.」
하였다.
그림자는 영산의 그림자라 하니
산 또한 영산의 산이라는 말이다.
조엄이 묻기를
「산영무이처(山影無二處)에
도로시영산(都盧是影山)이라.」
하였다.
「산과 그림자가 둘 아닌 곳엔 어떤 것이 영산이냐.」
하니 산 그림자 둘 아닌 곳엔 그것이 바로 영산이라 한 말이다.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영산이 큰 부채를 들어 일원(○)을 그리니 조엄이 자리에서 버선발로 내려와 오체투지 하였다.
「우리스님, 참으로 반갑습니다.」
이심전심이라 중생을 교화하는 법도 가지각색이다.
조엄 순찰사는 원래 전생엔 범어사에서 낭백(朗伯)이란 이름으로 중노릇을 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동래관청에서 전래의 배불숭유정책에 부응하여 270여종의 부역을 스님들에게 부과하여 그 일을 하고 중노릇 할 사람이 없었다.
스님들은 이렇게 노동이 심할 바에야 차라리 마을에 내려가 잡역을 하고 남은 시간에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절들이 텅텅 비게 되었다.
그 때 낭백 스님은 마을에 내려와 비산비야에서 초막을 치고 참외를 심었다.
지나가는 배고픈 사람들에겐 참외를 무료로 주고 또 신을 삼아 신 없는 사람에겐 신을 주었다.
그는 생각하기를 내가 박복하여 스님이 되었으나 스님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고생만하게 되니 금생에 복을 지어 내생에는 이 고을 감사나 순찰사가 되어 이 억울한 일을 벗겨주고 불법을 잘 닦게 만들어야 되겠다는 위대한 원력에서였던 것이다.
과연 그는 30여년을 그렇게 지내다가 죽으면서,
「앞으로 20년 후에 혹 벼슬하는 사람이이 절에 와서 고된 잡역을 없애주거든 그이가 곧 오늘 나인 줄 알라.」
말하였다.
그런데 그 뒤 20년. 과연 조엄이라는 순찰사가 와서 절 사정을 듣고 잡역을 없애주고 스님들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오늘도 유생의 방약무도한 모습을 대중 앞에서 보이다가 그 모습 그대로 가서 5체투지를 하니 다른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 있겠는가?
이로 인하여 동래 일대가 불지촌(佛地村)이 되고 범어사는 노역을 면하였으니, 영산스님은 이처럼 무영(無影)의 병을 설하여 만인을 제도하였던 것이다.

<韓國高憎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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