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 스님이 석장을 부리다

양지 스님이 석장을 부리다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자재설화

• 주제 : 자재
• 국가 : 한국
• 시대 : 신라
• 지역 : 경상도
• 참고문헌 : 삼국유사

석양지(釋良志)는 그의 조고(祖考=조상)와 향읍(鄕邑)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선덕왕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錫株=중의 지팡이)의 끝머리에 포대 하나를 걸어 두면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의 집에 가서 흔들면서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 그것을 알고 재의 비용을 넣게 되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가 거주하던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양지는 신기하고 이상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한편으론 여러가지 기예(技藝)에 까지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을 잘하여 영묘사(靈廟寺)의 장륙삼존(丈六三尊)상과 천왕(天王) 상과 전탑(殷塔)의 기와와 천왕사(天王寺)탑 밑의 팔부신장(八部神將)과 법림사(法林寺)의 주불(主佛) 삼존(三尊)과 좌우금강신(左右金剛神)등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의 편액(扁額)을 썼으며, 또 일찌기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부처 3천개를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 두고 예했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丈六傷)을 만들 때 입정하여 삼매에서 뵌 부처를 모형으로 삼았는데 온 성안의 남자와 여자들이 진흙을 다투어 운반했었다.
그때 남녀들이 읊은 풍요는 이렇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인생은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온다.

지금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일할 때에 모두 이 노래를 부르니 대개 이때 시작되었던 것이다.
상(영묘사 장륙상)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에는 곡식 2만 3친 7백석이 들었다―혹은 금색을 다시 칠 할 때의 조(租)라고도 한다―논평하면, 양지 스님은 재주가 구비하고 덕이 충실했으며 유평한 대가로서 말기(末技)에 숨기고 있는 이라고 하겠다.
기린다.

재 마치니 법당 앞에 석장은 한가한데,
향로에 손질하여 단향(壇香) 피운다
남은 경 다 읽으니 더 할 일 없어,
불상을 만들어 합장하며 본다.

<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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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3/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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