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숙이 여러가지 모습을 나타내다

혜숙이 여러가지 모습을 나타내다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자재설화

• 주제 : 자재
• 국가 : 한국
• 시대 : 신라
• 지역 : 경상도
• 참고문헌 : 삼국유사

석혜숙(釋惠宿)은 화랑 호세랑(好世郎)의 무리 중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호세랑은 이미 황권(黃卷=화람의 명부)에서 이름을 지어버렸고, 스님(혜숙)도 적선촌(赤善村) 지금 안강현(安康縣)에 적곡촌(赤谷公)이 일찌기 그 (적선촌)들에 가서 사냥을 했다.
하루는 혜숙이 길가에 나가 말고삐를 잡고 청했다.
「소승(小憎)도 모시고 따라가렵니다. 좋겠습니까?」
공은 이를 허락했다.
이에 이리 저리 뛰고 달려 옷을 벗어젖히고 서로 앞을 다투니, 공이 기뻐했다.
앉아 쉬자, 고기를 굽고 삶아 서로 먹기를 권하니 혜숙도 또한 같이 먹으며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이윽고 혜숙이 공의 앞에 나아가 말했다.
「지금 맛있는 고기가 여기 있는데 좀 더 드리겠습니다. 어떻겠습니까?」
공은 말했다
「좋다.」
혜숙은 사람을 물러치고 제 다리의 살을 베어 소반에 놓아 올리니 옷에 붉은 피가 줄줄 어리어 흘렀다.
공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째서 이 판이냐?」
「처음에 제가 생각하기는 공은 인인(仁人)인지라 능히 자기를 미루어 물(物)에 까지 미치리라 하여 따라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공의 좋아하는 것을 살펴 보건대 오직 죽이는 것만을 몹시 즐기어 짐승을 죽여 자기만 기를 뿐이오니 이것이 어찌 인인군자라 할 일이겠습니까?
저희들의 무리는 아닙니다.」
마침내 옷을 떨치고 가버렸다.
공은 크게 부끄러워 그가 먹은 것을 보니, 쟁반 안에 고기 살점이 그대로 있었다.
공은 매우 이상히 여겨 돌아와서 조정에 아뢰었다.
진평왕이 이 말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맞아 오게 했더니, 혜숙은 여자의 침상에서 누워 자는 것을 보였다.
사자는 더럽게 여겨 돌아오다가 7,8리쯤 가서 혜숙을 도중에서 만났다.
사자는 그가 어디서 오는가를 물었다.
「성안 시줏댁 집 7일재에 갔다가 끝마치고 오오.」
사자가 그 말을 왕에게 아뢰었더니 또 사람을 보내어 그 시주의 집을 조사해 보니 그것이 또한 사실이었다.
얼마 후 혜숙이 문득 죽었다.
마을 사람은 이현(耳峴)―혹은 형현(硎峴)이라고도 쓴다.―동쪽에 장사 지냈다.
그 때 그 마을 사람으로서 고개 서쪽으로부터 오던 사람이 있었는데 혜숙을 도중에서 만나 그가 어데 가는가를 물었다.
「이 곳에 오랫동안 살았으므로 다른 지방에 유람하려 한다.」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다.
혜숙은 반리쯤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그 사람은 고개 동쪽에 이르러 혜숙을 장사지낸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음을 보고 그 사유를 자세히 말했으므로 무덤을 헤쳐 보니 다만 짚신 한 짝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 안강현의 북쪽에 혜숙사(惠宿寺)란 절이 있는데, 곧 그가 살던 곳이라 하며. 또한 부도(浮圖)도 있다.
석혜공(釋惠空)은 천진공(天眞公)의 집에 고용살이 하던 노파의 아들인데 아이 때 이름은 우조(憂助)―아마 우리 말일 것이다―였다.
공이 일찌기 몹쓸 종기가 나서 거의 죽게 되자 문병하는 이가 길을 메웠다.
이 때 우조는 나이 7세였는데, 그 어머니에 게 말했다.
「집에 무슨 밀이 있기에 손님이 이렇게 많습니까?」
「주인께서 악병(惡病)이 나서 장차 돌아가게 되었는데 너는 어찌 알지 못하느냐?」
「제가 병을 고치겠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이상히 여겨 공에게 알렸다.
공이 그를 불러 오게 하니, 와서 평상 밑에 앉아서 한 말도 하지 않았는데 미구에 몹쓸 종기가 터져버렸다.
공은 이것이 우연한 일이라 하고 그다지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이미 자라 공을 위해 매를 길렀는데 공의 마음에 퍽 들었다.
처음에 공의 아우로서 벼슬을 얻어 지방으로 부임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골라 놓은 매(좋은 매)를 얻어 가지고 치소(治所)로 갔다.
하룻저녁에 공은 문득 그 매를 생각하게 되어 이튿날 새벽에는 우조를 보내어 매를 가져 오려했다.
우조는 이미 이것을 먼저 알아채고 잠깐 사이에 매를 가져 와서 새벽에 공에게 드렸다.
공은 크게 놀라 깨달아 그제야 전일에 몹쓸 종기를 치료한 일들이 모두 측량할 수없음을 알게 되었다.
공은 우조에게 말했다.
「나는 지덕이 뛰어난 성인이 우리 집에 의탁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광언(狂言)과 비례(非禮)로서 모욕했으니 그 죄를 어찌 씻겠습니까? 이 후로는 도사(導師)가되어 나를 인도해 주시오.」
마침내 내려가서 절을 했다.
우조는 신령스럽고 이상함이 이미 나타났으므로 드디어 출가하여 중이 되어 이름을 혜공(惠空)이라 바꾸었다.
그는 늘 한 작은 절에 살면서 언제나 미친 것처럼 크게 취해서 삼태기를 지고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춘 까닭에, 그를 부궤화상(負蓋和尙)이라 불렀으며 그가 있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 했다.
부개는 곧 례(溥)의 우리 말이 다 언제나 절의 우물 속에 들어가면 몇 달이나 나오지 않았으므로, 스님의 이름으로 그 우물 이름을 지었다.
우물에서 나올 때마다 푸른 옷 입은 신동(神童)이 먼저 솟아 나왔으므로, 절의 중이 이로써 나오는 시각을 알게 되었으며, 나오더라도 옷은 젖지 않았다.
만년에는 항사사(恒沙寺)―지금의 영일현(迎日縣) 오어사(吾魚寺)다.
민간에서는 항하사(恒河沙)처럼 많은 사람이 출세했으므로 항사동(恒沙洞)이라 한다고 한다―에 가서 있었다.
이때 원효(元曉)는 여러 불경의 소(疏)를 찬술(撰述)하고 있었는데, 언제나 혜공스님에게 가서 질의하고 흑은 서로 희롱도 했다.
하루는 혜공과 원효가 시내를 따라가며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위에 대변을 보고 있는데 혜공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했다.
「당신이 눈 똥은 내가 잡은 물고기일 거요.」
그로 인하여 오어사(吾魚寺)라 했다.
어떤 이는 이를 원효대사의 말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민간에서는 그 시내를 불러 모의천(芼矣川)이라고 한다.
구감공은 언젠가 산에 올라갔다가 혜공이 산길에 죽어 쓰러져, 그 시체가 부어 터지고 살이 썩어 구데기가 난 것을 보고 한참동안 슬퍼했다.
고삐를 돌리어 성안에 들어가자 혜공이 크게 취해서 시중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것을 보았었다.
또 하루는 풀로 새끼를 꼬아가지고 영묘사(雲廟寺)에 들어가서 금당(金堂)과 좌우의 경루(經樓)와 남문의 낭무(廊)에 둘러 묶고 강사(剛司)에게 알렸다.
「이 새끼줄은 3일 후에 풀어라.」
강사는 이상히 여겨 그의 말대로 했더니 과연 3일만에 선덕왕이 행차하여 절에 왔는데, 지귀의 심화가 나와 그 탑은 태웠으나 다만 새끼 맨 곳만은 화재를 면했다.
또 신인종(神印宗)외 조사 명랑(明郎)이 금강사(金剛寺)를 새로 세우고 낙성회를 베풀었을 때에, 고승들이 다 모였으나 오직 혜공스님만은 오지 않았다 명랑이 향을 피우고 정성껏 기도했더니 조금 뒤에 공이 왔다.
이때 바야흐로 큰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도 공의 옷은 젖지 않았고, 발에는 진흙이 묻지 않았다.
공은 명랑하게 말했다.
「초청이 은근해서 왔소.」
이처럼 신령스런 자취가 매우 많았으며, 죽을 때는 공중에 떠서 세상을 마쳤는데, 그의 사리는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언젠가 조론(肇論)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내가 옛적에 지은 것이다.」
이로써 혜공이 승조의 후신임을 알겠다.
기린다.

벌판에서 사냥하고 평상에 누웠었고,
술집에서 노래하고 우물 속에서 잠을 잤다.
혜숙과 혜공이 어디로 떠났는고,
한 쌍의 귀중한 불 속의 연꽃이리.

<三國遺事>

연관목차

872/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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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설화
포교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