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파스님이 물위를 걸어가다

용파스님이 물위를 걸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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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자재
• 국가 : 한국
• 시대 : 조선
• 지역 : 경기도
• 참고문헌 : 한국사찰사료집

근세조선 제 22대 정조(正祖) 대왕 때의 일이다.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가 민정을 살피기 위해 경향 각지를 유랑하다가 4불산(佛山) 대승사(大乘寺)에 이르러 젊은 스님네들이 누각 위에 앉아 장기 두는 것을 보았다.
「장이야 받자.」
「무슨 장?」
「상(象)장 아니야」
하니 옆에 있던 스님 한 분이 말(馬)로 상을 치고 차(車) 길을 트고 도리어,
「멍군 받아라.」
소리쳤다.
어사 문수 생각하기를, 수도하는 스님이라면 염불이나 참선을 해야 하고 또 공부가 다 된 스님이라면 거리에 나서 무량한 중생을 깨우쳐 주어야 하는 것인데, 젊은 스님들이 누각에 걸터앉아 대낮에 장기를 두다니―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리면서 법당 앞에다 그것을 내놓고 철철철 오줌을 쌌다.
그 때 한 스님이 이것을 보고 외쳤다.
「여보시오. 뉘신지는 몰라도 의복은 남루해도 거동이 선비임에 틀림없거니 법당 앞에서 함부로 소변을 보다니, 이런 실례가 어디 있소?」
하고 야단을 쳤다.
박어사 가로되,
「말(馬)이 가고 차(車)가 오고 또 상(象)이 간다 하기로 나는 마굿간인 줄 잘못 알았소.
이 집이 부처님에게 사용되는 집인 줄 알았다면 그럴 리가 있겠소.」
이렇게 대꾸하고 돌아선 박어사는 나라에 이 사실을 품고하여 각 사찰 중들이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장기나 두고 있으니 무엇인가 일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래 나라에서는 그 후부터 남도 절에 있는 스님네들은 종이를 떠서 나라에 진상하고 금강산 같은 산악에 있는 절 스님들은 잣박산을 만들어 진상토록 하였다.
이것이 본이 되어서 인지 지방 양반들도 덩달아서 승려들에게 족보종이를 대라 하고 잔치음식을 만들어 오라 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폐단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진짜 공부를 하려고 하는 스님들도 공부를 할 수 없게 되고 또 건달처럼 놀던 스님들도 견디다 못해 다 나가곤하였다.
이 광경을 본 도인 용파스님이 크게 한숨을 쉬고 이 일을 시정하지 않고는 아니 되겠다 생각하여 몇 번 관청에 나가 호소하였으나 전무효력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부처님의 가피로 이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생각하고 남해 거제도로 들어가 홀로 백일을 기약하고 기도하였다.
들어 갈 때는 배삯을 주고 배를 불러 탔으나 나올 때는 물로 걸어나을 심산을 하고 그대로 무인절도에서 백일 먹을 식량만 가지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백일이 지나도 기미는 감감하였다.
「내 죽더라도 힘을 얻지 않고는 이 곳을 나가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더욱 분발하였는데 하루는 과연 노인이 나타나.
「이 미련한 중아. 굶어죽으면 그만이지. 누가 너의 속을 알아주는 자 있을 줄 아냐.」
하고 빈정댔다.
스님은,
「먹을래야 먹을 것이 있어야죠.」
「이 아래로 내려가면 돌 꽃(石花)이 있다. 우선 그것을 먹으라.」
하였다.
용파스님이 바닷가로 내려와 보니 과연 돌 사이에 꽃이 허옇게 피었는데 그걸 깨뜨려 먹어보니 속이 든든하였다.
한3일 그렇게 돌 꽃을 먹고 공부하는데 하루는 무서운 태풍이 불어와 온 바다는 용솟음쳤다
이튼 날 바람이 개이기를 기다려 바닷가에 나아가니 배 한척이 놓여 있는데 거기 쌀 두 가마니와 소금 한 말이 있었다.
부처님 말씀에,
「주지 않는 것은 갖지 말라.」
하였으므로 그는 보고도 그냥 돌 꽃만 따먹고 올라왔다.
그러자 다시 그 노인이 나타나,
「그것은 임자가 없는 물건이니 갖다 먹으라.」
하였다.
스님은 그것을 먹고 공부하기 1년, 마침내 신통을 얻고 물위로 걸어 나왔다.
부산 사람들은 그를 보고 용이 파도를 타고 오는 것과 같다고 낭파(浪波), 용카(龍波)라 하였는데 뒤에 호를 용파(龍波)라고 했다.
육지로 나온 스님은 봉두난발,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 밖에서 물장수를 했다.
그러나 임금님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려웠다.
지금 같이 대통령이나 대왕을 마음대로 만날 수 있는 시절도 아니고 또 더군다나 중이라면 천대를 하는 시절이라, 더욱이 나라 임금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와 같았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는 대왕님을 만나 나의 이 하소연을 고백할 날이 있겠지 하고 남의 물이나 길어다 주고 밥이나 얻어 먹고 있기 3년이 지났다.
그 때 마침 정조 임금이 민정을 살피려고 대궐안의 무예청 무감 별감을 대동하고 나오는데 한강일대를 바라보니 어떤 집에서 오색구름이 청룡 황룡과 같이 엉키어 틀고 올라가는 것 같았다.
「저, 저게 뭐야?」
「글세 올시다. 서기방광을 하는 것 같습니다.」
「너 빨리가 그 자취를 잡아오너라.」
이 말을 들은 별감은 그 빛이 쏟아져 나오는 집으로 들어가니 다 늙은 노인이 누더기 한 장을 덥고 드러 누웠다
「네가 누구냐?」
「시골서 올라온 중입니다.」
「중이 왜 이런 곳에 와 있느냐?」
스님은 서슴치 않고 전후 사정을 소상히 이야기 했다. 그랬더니 이 별감,
「여보시오 대사님, 이제 스님의 정성으로 대감중의 진짜 대감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서 가십시다.」
하였다. 와서 보니 과연 정조대왕이었다.
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였다.
「사람 가운데는 잘난이도 있고 못난이도 있듯이 중 가운데도 게으른 놈도 있고 부지런한 놈도 있습니다. 몇 사람의 게으른 중을 보고 온 나라의 중을 괴롭히는 것은 장차 나라의 정신을 무디게 하는 것이오니. 대장께서는 어질게 살핌이 있으소서.」
「좋다. 너의 정성은 지극하나 여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무슨 조건이옵니까?」
「다른게 아니라, 늙은 나에게는 아직 왕통을 이을 자손이 없으니 대사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왕손을 보게 하라.」
「자고로 부처님 전에 정성들이면 성취를 이루지 못하는 일이 없사오나 저 혼자로서는 어렵사오니 소승의 도반인 농산과 같이 기도하게 해 주십시오.」
「농산은 어디 있는가?」
「삼각산 금선암에 있습니다.」
「그러면 내일 궁중에서 부를 터이니 같이 입궐하라.」
이때부터 승려가 종이를 만들어 나라에 진상하는 폐습은 없어졌으나 황자를 낳게 해달라는 부탁은 실로 작은 일이 아니었다.
중의 복색을 차리고 대궐에 들어갔다 나온 용파스님은 두 사람이 각각 3백일을 기한으로 정하고 용파스님은 양주군 수락산 내원암에서, 농산스님은 삼각산 금선암에서 각각 기도를 시작했다.
용파스님이 어느 날 삼매에 들어 혜안(慧眼)으로 살펴보니 황자탄생도 여간한 복덕과 지혜가 아니면 아니되는지라 농산이나 자기가 아니고서는 우리나라에서는 황자가 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용파스님은 그때 지방에 사원건축과 불상조성의 불사를 맡은 일이 많아 세상을 속히 떠나기 어려웠으므로 농산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적어 보냈다.
「우리가 다 같이 임금의 은혜를 받고 있는데 모처럼 부탁하시는 소청을 들어 드리지 아니하면 백성된 자의 본의가 아닌즉 황송하오나 스님이 궁중에 전생(轉生)하여 황자가 되셨으면 어떠하겠소.
내 마땅히 먼저 그러해야할 일이오나 너무나도 벌려 놓은 일이 많아 아직 때가 이른가 하나이다.」
농산은 글을 받아 보고.
「견성성불을 목적하는 남자가 황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본의가 아닌 줄 아오나 스님의 소청이 그러 하오니, 스님과 나는 이체동심(異體同心)이라 말세의 불법을 위하여, 황은의 보답을 위하여 스님의 부탁대로 하겠나이다.」
답서를 써 보냈다.
3백일 기도가 끝나는 날 밤 정조대왕비의 꿈에,
「저는 삼각산 금선암에서 나라의 기도를 맡아 하던 중인데, 용파스님의 권유로 상감의 대를 잇고자 왔사오니 부디 물리치지 마십시오.」
하고 합장하고 들어왔다.
정조 임금은 이 말을 듣고 곧 사람을 보내어 삼각산에 알아보니 기도법사 농산이 기도를 마치자 곧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나라에서는 쌀과 비용을 후히 보내 장사지내게 하고 또 용파스님께도 크게 상을 내리니 얼마 있다가 부인이 아이를 가져 정조의 후계를 잇게 되었다.
<韓國寺刹史料集 金仙庵 內院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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