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스님이 구속을 받지 않다

원효스님이 구속을 받지 않다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자재설화

• 주제 : 자재
• 국가 : 한국
• 시대 : 신라
• 지역 : 경상도
• 참고문헌 : 삼국유사

성사(聖師) 원효의 속성은 설(薛)씨다.
그의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의 사당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담내내말(談乃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章山郡)이다―불지촌(佛地村)북쪽 밤 나ant골(栗谷)의 사라수(裟羅樹) 아래에서 탄생했다.
마을의 이름은 불지(佛地)인데. 혹 발지촌(發智村)이라고도 한다.―
우리 말로서는 불등을촌(佛等乙村)이라 한다.― 사라수(裟羅澍)란 민간에 이런 얘기가 있다.
성사의 집은 본디 이 골짜기(谷) 서남쪽에 있었다.
그 어머니가 아기를 배어 달이차서 마침 이 골짜기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문득 해산하게 되었으므로 너무 급해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고 그 속에 누워 해산 하였으므로 그로 인하여 이 나무를 사라수(裟羅澍=사라 비단을 건 나무)라 했다고 한다.
그 나무의 열매도 또한 보통 나무와는 달랐으므로 지금도 사라율(裟羅栗)이라 일컫는다.
옛날부터 전하기를,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이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룻저녁 끼니로 밤 두개씩 주었더니, 종은 적다고 관가에 호소했다.
관리가 이를 괴이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 검사해 보았더니, 한 개가 바리때 한 그릇에 가득 찼으므로, 이에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을 내렸다.
그래서 밤나뭇골(=栗谷)이라 했다고 한다.
성사는 출가하자 그 집을 내놓아 절로 삼아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했다.
또 사라수나무 곁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裟羅寺)라 했다.
성사의 행장에는 서울 사람이라 했으나 이는 할아버지의 본거(本居)를 좇아 말한 것이며, 당승전(唐憎傳)에는 본디 하상주(下湘州)사람이라 했다.
살펴보면 이렇다. 인덕(麟德)2년 사이에 문무왕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나누어 삽량주(枾良州)를 두었으니, 하주는 곧 지금의 창령군(昌寧郡)이고, 압량군(押梁郡)은 본시 하주(下州)의 속현(屬縣)이다.
상주는 지금의 상주(尙州)니 또는 상주(湘州)라고도 쓴다.
불지촌(佛地村)은 지금 자인현(慈仁縣)에 속해 있으니 곧 압량군에서 나뉜 곳이다.
성사의 아명은 서당(誓縮=새돌이)이요, 제명(第名)은 신당(新幢)이다―당(童)은 우리말로는 돌? (毛=돌→털(毛) 이라고 한다.
처음에 어머니 꿈에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더니 이내 태기가 있었다 해산하려 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는데, 그 때는 진평왕 39년 대업(大業) 13년 정축 617이었다.
성사는 탄생하자 총명하고 뛰어나. 학문을 스승 없이 하게 되었다.
그가 승려가 되어 사방으로 다니며 수행(修行)한 시말과 불교를 널리 폈던 큰 업적은 당전(唐傳=唐僧傳)과 그의 행장에 상세히 실려 있으므로 여기에는 다 적지 않는다.
다만 향전(鄕傳)에 실린 한 두가지의 이상한 사실이 있으니 적어둔다.
성사는 일찌기 어떤 날 상례(常例)에 벗어나,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노래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무열왕)이 이 노래를 듣고 말했다.
「이 스님께서 아마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구나,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 보다 더 이로움이 없을 것이다.」
이때 요석궁(瑤石宮)―지금의 학원(學院)이 바로 이 곳이다.―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宮吏)를 시켜 원효를 찾아 요석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궁리가 칙명을 받들어 원효를 찾으려 하는데, 벌써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문천교(蚊川橋)를―사천(沙川)인데 민간에서는 연천(年川), 또는 문천(蚊川)이라 한다.
또 다리 이름은 유교(楡橋)라 한다―지나오므로 만나게 되었다.
원효는 일부러 물 속에 떨어져 옷을 적시었다.
궁리는 성사를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니 그 곳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다.
공주는 과연 아기를 배더니 설총(薛聰)을 낳았는데, 설총은 나면서 총명하여 경서(經書)와 역사책을 널리 통달했다. 그는 신라10현중의 한 분이다.
우리말로써 중국과 외이(外夷)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 등에 통달하고 이회(理會)하여 육경 문학을훈해 했으므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명경을 업으로 하는 이는 그 훈해를 이어 받아 가며, 끓어지지 않는다.
원효는 이미 계를 범하고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인의 옷을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일컬었다.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괴이했다.
성사는 그 모양대로 도구를 만들어 화엄경의「일체 무애인(無碍人)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란 문귀에서 따서 이름 지어 무애라 하며 이내 노래를 지어 세상에 퍼뜨렸다.
일찌기 이것(도구)을 가지고 많은 촌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고 음영(吟詠)하여 돌아 왔으므로, 가난하고 무지몽매한 무리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호를 알게 되었고, 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부르게 되였으니 원효의 법화는 컸던 것이다.
성사가 그가 탄생한 마을 이름을 불지촌(涕地村)이라 하고, 절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고 스스로 원호(元曉)라 일컬은 것은, 모두 불일(佛日=불교)을 처음으로 빛나게 했다는 뜻이다.
원효란 말도 또한 우리말이니 그 당시의 사람은 모두 우리말로써 새벽이라 했다.
일찌기 분황사에 살면서 화엄경(華驗經)을 지었는데, 제 4권 십회양품(十廻向品)에 이르러 그만 그쳤었다.
또 일찌기 송사(訟)로 말미암아 몸을 일백 소나무에 나뉘었으므로 모든 사람이 이를 위계의 초지라고 일 렀다.
또한 바닷 용의 권유에 따라 노상에서 조서극 받아 삼매경 (三味經)의 소(疏)를 지었다.
그 때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두었으므로 이를 각승(角乘)이라 했는데, 이는 또한 본각 시각 2각이 숨은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안법사(大安法師)가 와서 뜻을 붙였으니 또한 기미(氣味)가 상통해 창(唱)하고 화답한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설총은 그 유해를 부수어 진용(眞容)을 소상으로 만들어 분황사에 보시고, 공경 사모하여 극도의 슬픈 뜻을 표시했다.
설총이 그 때 결에서 예배하니 소상이 문득 고개를 돌려 돌아보았으므로, 지금도 여전히 돌아본 채로 있다.
원효가 일찌기 거주하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의 집터가 있다고 한다.
각승(角乘)은 처음으로 삼매축(三味軸)을 열었고, 무호(舞壺)는 마침내 만가풍(萬街風)에 걸었다.
달 밝은 요석궁엔 봄 잠이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고영(顧影)만 비었다.

<三國遺事>

연관목차

871/1978
견성설화
자재설화
사리설화
포교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