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말라야의 네팔불교

희말라야의 네팔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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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호국
• 국가 : 기타
• 참고문헌 : 동남아불교

네팔은 히말라야산맥의 주맥들이 북부의 국경선을 따라 동서로 달리고 그 남쪽으로는 마하바라트 산맥이 소히믈라카를 이루는 구릉지역에 위치해 있다.
국토면적은 14만1천 ㎢이고 인구는 1천 314만 명의 소왕국이다.
중앙산지인 고지대에는 몽고계의티베트족·버마족 등 여러 종족이 토착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힌두교와 라마교가 혼재하여 구별이 분명치 않은 양상을 보이는 점이 특징 적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중앙산지의 북부지역인 고지대에는 셀퍼를 하는 티베트인이 많아, 자연 라마교가 강한 편이고. 남부의 힌두스탠 평원으로 이어지는 저지대에는 농경을 하는 인도계 종족이 많고 종교도 힌두교가 우세하다.
네팔은 불교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성지 룸비니를 국경 안에 두고 이다.
부처님이 탄생한 룸비니는 남부 타라이 지방의 최대도시인 마이라와 서쪽 18km지점 즉 티우나 강 등 몇 개의 작은 강을 가로질러서 자동차로 30분쯤 달리는 거리에 있다.
19세기 이전까지 이곳은 매몰된 채 잡초만 무성했었다.
8세기경 이곳을 순례한 혜초(慧超)는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에서 이곳을 방문한 기록을 남기고 있으나. 13세기경 인도의 불적지(佛蹟地)를 순례한 티베트의 승려 다르마스마빈은 그의 기행문에서 룸비니를 언급치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룸비니는 10~13세기 인도를 침입한 회교군에게 파괴되었을 것으로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룸비니가 탄생의 성지로 확인된 것은1896년 고고학자 퓨라박사에 의해서다.
그는 이곳 유적을 발굴하면서, 아쇼카왕이 세운 석주(石柱)를 찾아내고, 이곳이 룸비니임을 확인했다.
고고학적 유적지로만 남아 있던 룸비니는 1967년까지만 해도 황폐한 모습 그대로였다.
당시에 이곳을 방문했던 우탄트(전 UN사무총장)는 이를 애석히 여겨 룸비니의 재건을 호소, 세계인의 호응을 얻어 이곳을 개발했다.
현재 룸비니에는 룸비니 개발위원회 사무실과 티베트사원의 숭려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탄생의 성지 룸비니가 있는 나라 네팔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이 언제인가는 확실치 않다.
네팔불교의 상징인 스와얌브나드 스류파(일명 한탑(限塔))가 건립된 것이 1세기경이라고 하니까, 이때에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네 팔의 수도 카투만두 서쪽 교외에 있는 이 탑은 높이가 20m이고 4각탑신 윗부분에는 9개의 상륜(相輪)이 뾰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탑신에는 동서남북 사방을 꿰뚫어본다는 부처님의 눈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양식상으로 보아 밀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네팔의 불교 전래시기는 훨핀 하대(下代)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흔히<네팔벨리>로 불리는 네팔의 중앙산거에는 기원전 6세기경부터 많은 부족국가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 가장 세력이 강설했던 카리티족은 왕국을 세워 29대를 이었다.
그 뒤에 리차비왕조(300-800)와 바초리왕조(800-1200)가 이 지역을 지배했으며, 뒤를 이어 유명한 밀라왕조가 18세기까지 계속됐다.
말라왕조의 역사도 전기(1200-1480), 후기(1480~1750)로 나누는데 이 무렵 네팔에는 <네팔불교>라고 할 만한 특징과 문화가 확립됐다.
불교는 인도의 갠지즈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을 거듭하여 전 인도와 동남아 중국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자기 변모를 거듭한다.
사상적으로는 이른바 원시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가 차례로 일어나 그 의례와 불교문화도 힌두교의 영향으로 변모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 밀교학 밀교는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특히 티베트에서는 샤머니즘적 본교와 융합하여 라마교라는 독특한 불교를 발전시켰다.
네팔은 산지 아래로는 인도와 인접해있지만, 등 뒤의 히말라야를 넘으려면 티베트와도 접경을 이루고 있다.
한때 네팔은 티베트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이때 라마교가 자연스럽게 네팔에 뿌리내리게 됐다.
물론 네팔은 불교를 티베트로부터 전수받은 것만은 아니다.
인도대륙에서 융성하던 불교는 주변국가인 이곳에 자연스럽게 전파되었을 것이지만 힌두교의 영향으로 그렇게 융성한 편은 못 되었다.
또 불교라 해도 그것은 이미 힌두교의 영향으로 변질된 헝태로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라마교의 정착은 매우 용이했을 것임을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오늘의 네팔불교는 곧 <라마교>를 지칭한다.
네팔 곳곳에 있는 사원은 모두 티베트승려들에 의해 운영되는 라마사원들이다.
티베트의 법왕이자「살아 있는 부처」「관음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되는 달라이라마는 티베트가 중공에 의해 공산화되자, 티베트를 떠나 많은 라마숭을 데리고 네팔로 옮겨갔다.
그 년에 와서는 티베트 난민과 승려의수가 늘어나자, 사원도 새로 지어졌다.
네팔의 불교문화는 대체로 말라왕조, 그중에서도 후기 말라왕조때 설립, 완성된 것이다.
전기 말라왕조 때에도 이슬람군이 크게 융성했지만, 14세기경 벵갈 지방으로부터 이슬람군이 카트만두 분지에 침입하여 불교사원을 파괴하고 행정기구를 마비시키자 크게 위축되었다.
14세기말 유능하고 강직한 시티말라왕이 네팔을 재통일하면서 다시 불교가 꽃피기 시작하였다.
카트만두 동남쪽에 이는 말라왕조 후기의도성 바드기온이나, 남쪽에 있는 고도(古都)파탄에는 지금도 많은 힌두사원과 불교사원이있다.
바도사원에 있는 불교사원은 모두 삿갓 같은 지붕을 3~4층씩 쓰고 있는데, 그 옆에는 또 힌두교 특유의 파라밋형 신전이있다.
파탄에는 원숭이신을 모신 힌두사원부근에 마하붓다사원이 있다.
이 사원에는4천 개의 불상이 벽돌 하나하나에 조각돼있어 장관이다.
네팔에는 이러한 힌두사원, 불교사원이 2천 500여 개에 달한다.
그러나 두 종교간의 엄격한 구분이 없어, 네팔불교에 대한예비지식이 없는 순례자들은 힌두의 신앙을 관음보살이라고 참배하기도 하고, 힌두의 승려를 불교의 승려로 오인하기도 한다.
특히 네팔은 많은 사원의 탱화에도 힌두교 성력파의 영향을 받아 구세불 둘레에 육감적인 미녀를 배치하고, 사원의 벽면에는 에로틱한 여신상을 조각하고 있어 불교와 힌두교가 어떻게 혼재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말라왕조는 18세기 중엽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왕국을 3분하여 통치했으나, 호전적인 구르카족의 침입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불교는 티베트에서 온 라마승들에게 의해 계속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스와얌브나드사원 경내에는 소년 불교학교가 운영되고 있으며. 학생은 200여명 정도다.
이들은 모두 사원에서 합숙을 하면서 종교예절. 교리 외에 일반 중학과정을 배우고 있다.
허락 없이 집에도 갈수 없는 엄격한 규율아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이들이 앞으로 네팔불교를 이끌어갈 재목이 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동남아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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