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공주의 출가와 함흥차사

경순공주의 출가와 함흥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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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호국
• 국가 : 한국
• 시대 : 조선
• 지역 : 경기도
• 참고문헌 : 태종실록

고려왕조가 34왕, 475년간(서기 918~1392년)으로 끝나고, 태조 이성계가 이씨왕조를 건설하여 즉위한 지 7년 만에 무인(戊寅, 서기 1392년) 8월에 제1차 왕자의 난(王予亂)이 일어났다.
제 1차 왕자의 난이란 즉 이태조는 제 1왕후인 신의왕후(神驚王后) 한써(韓氏)의 소생으로 방우(芳雨)·방과(芳果 :定宗) ․ 방의(芳毅)·방간(芳幹)·방원(芳遠 : 太宗) ․ 방연(芳衍)등 6형제가 있었고, 제 2왕후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소생으로 방번(芳番)과 방석(芳碩)의 형제와 딸 경순공주(慶順公主)가 있었다. 태조가 즉위하자 바로 세자 책립의 문제가 일어났다.
이때 배극렴(輩克廉)등은
「평시라면 적자(嫡子)를 세울 것이나, 비상시이므로 개국에 공이 있는 제 5남 방원을 세움이 옳다.」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왕비 한씨는 이미 별세하여 없고. 태조는 계비(繼媤) 강씨의 의향을 중히 여겨 제 7남인 방번을 세우려 하니, 배극렴 등은 그 사람됨이 적당하지 않음을 지적하여
「반드시 강비 소생을 세울 것이라면 제 8남인 방석이 좋다.」
고 하여 이를 세자로 삼게 되었다.
이 처사는 마침내 한씨 소생 왕자들의 불평을 사게 되었고, 특히 제 5남인 방원은 부왕의 창업을 도와서 공로가 클 뿐만 아니라, 야심 또한 큰지라 심중에 불평이 대단하였다.
이러는 중 태조 7년(무인) 8월에 방원은 세자 방석과(제 8낭) 그와 같은 어머니 소생인 방번(제 7남)을 죽이니 그 소생에 오직 살아남은 사람은 딸로 태어난 경순공주 뿐이었다.
공주는 이보다 앞서 흥안군 이제(李濟)와 결혼하여 겨우 목숨을 보전하여 살아남기는 하였으나, 험난한 세파에 몸 둘 곳을 몰라 부왕의 분부를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었다.
한편 태조 이성계도 방원(태종)에 대한 증원(增怨)의 감을 누르지 못하고 상심(傷心)을 달랠 길 없어 서울을 떠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제 2왕후 강씨 소생으로 오직 살아남은 일점혈육(-點血肉)인 경순공주를 불러 직접 눈물을 흘리면서 공주의 머리를 깎아 스님이 되게 하고 동대문 밖 청룡사에 가서 있기를 명하였다.
경순공주는 부왕의 명령대로 동대문 밖 청룡사를 찾았다.
이때 청룡사에는 고려 말기 임금인 공민왕의 왕비 혜비(惠妃)가 나라가 망하게 되자 이곳에 와서 스님이 되어 정진하고 있었다.
공주는 청룡사를 당도하여 자신의 전후사정을 자세히 전하니, 혜비는 공주를 반갑게 맞으며 하는 말이 「비구니나 나나 같은 처지구려 ! 왕씨의 나라를 너무도 참혹하게 없애더니, 이제는 또 이렇게 형제끼러 싸우는구려! 나무아미타불.」
하고 측은해 하였다.
공주는 이 말을 듣고 답하여 말하기를,
「혜비마마 ! 부왕의 잘못하신 과보가 이 몸에 왔나 보오이다. 부왕의 업륜(業輸)으로 고통을 당한다면 달게 받겠나이다.」
하고 일어나 합장하였다.
그 말을 듣고 혜비의 대답이
「고마운 말씀이오. 나는 아버지의 지나친 고집으로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오. 이제 누구를 원망하고 무엇을 한탄하겠소. 모두가 우리 스스로의 전생에 지은 업원이오. 이제부터는 서로 도와주고 서로 힘이 되어 살아갑시다.」
하고 공주를 위로하였다.
이렇게 서로의 과보를 뒤돌아보며 지난날을 생각하며 반성하고 참회하는 대화로 시작하여 한평생을 일념으로 수도하는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한편 태조는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극심한 상심 끝에 서울을 떠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마저 속세와 인연을 끊게 하였으니 그 가슴 아픈 일이란 말할 수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종(定宗) 2년(서기 1400년) 1월에 제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또 한번 형제가 서로 싸우고 살육을 거듭하니 즉, 제 4남 방간(芳幹)과 제 5남 방원(芳遠 :太宗)의 싸움으로 마침내 방간이 사로잡혀 귀양갔다가 죽었으니, 태조는 이 동복형제(同腹兄弟)간의 싸움에 더욱 통분을 느끼고, 태종 원년 3월 서울인 개경을 떠나(제 1차 왕자의 난으로 서울을 한양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음)한양을 들러 청룡사로 공주를 만나보고 그 길로 금강산을 거쳐 동북방면으로 향하여 안변에서 머무르다가, 다시 양주 소요산(逍遙山)에 별전(別殿)을 두고 소요하다가 마침내 함흥으로 가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이로부터 저 유명한「함흥차사(咸興差使)」의 비참한 전설을 남게 하고 공주와의 상면도 멀어져 갔다.

<太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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