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견의 호불치세와 도안의 공적

부견의 호불치세와 도안의 공적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중국
• 참고문헌 : 중국불교사

전진(前秦)은 16국중 가장 강대한 나라였다.
부견이 1백 대군으로써 남방 동진(東晋)을 병탄하고자 하였다가 비수의 일전에서 대패하여 드디어 와해하는 기인이 되기는 하였으나, 불교에 있어서는 대단월이었다.
전진의 불교는 후조의 불도징과 같이 도안이 그 대표자이다.
도안은 속성이 위(衛)써요, 상산의 부유인이다.
12세에 출가하니, 그 전기에, 신지 총민 이형모기루(神智聰敏而形貌其陋)라 함과 같이 형모가 초루하기 때문에 그 스승에게 중히 여기는 바 못되고 3년간 전사(圈舍)에 억역되었으나, 항상 경권을 손에 들고 다니면서 한번 읽으면 암송하였다고한다.
스님은 그 총명에 놀라 자유유학을 허락하니 업에 와서 중사에서 불도징을 만났다.
징이 보고 찬탄하여 더불어 종일 담론하었으나 대중은 형모가 볼 것이 없다고 하여 가볍게 여겼다.
그러나 징이 이사람의 지식은 그대들이 주필할 바가 아니라 하고 제자를 삼으니, 징이 구하면 안이 매양 복술하였다고 한다.
도안이 불도징에 사사한 것은 징이 업도에 주한 면년 13년중의 어느 기간이 되며, 그가 처음 만난 때는 불도징은 이미 100세가 넘었을 것이다.
도안은 30세 전후의 장년시대, 호학의 의기가 넘쳐흐를 때이다.
불도징이 입적한 다음해에는 후조의 주 석호가 몰하고, 글 후에는 내란이 일어나 염민의 찬탈등이 있어서 일만 대중과 함께 왕실 여상산에 들어갔다가 도하하여 육혼산에서 목식수학(木食修學)하고 있었으나 다시 모용준(慕容俊)의 군사가 육혼에 핍박하므로, 축법태는 제자 10여인과 더불어 양자강을 따라 남강의 건강에 나아가게 하고, 법화는 강상의 촉에 들어가고, 도안은 만방교화의 목적으로 제자 400여인과 함께 양양 백마사에 이주하였다.
양양에 주하기 15년, 그 도풍은 천하를 풍미하였다.
북방의 패를 잡고 있던 부견은 도안을 장안에 영입하려는 원이 간절하였던 바 그 후 부하에게 명하여 양양을 공략하고 도안을 영입하니, 부견이 좌우에 말하기를,
「내 10만의 병을 발하여 양양을 공취하니, 얻는 바는 단지 1인 반 뿐이다. 1인은 도안이요, 반은 습착치라.」
고 하였다.
습착치는 양양의 유자로서 천하 제일인자로 자임하고 있던 바 도안을 만나,「미천의석도안 여기 있다.」라고 하여 호염이 되었다 한다.
도안은 대원 4년 장안에 와서 5중사에 주하고 도제들은 교양하는 한편 부견을 선도하였다.
그는 전진의 건원 21년(385) 2월에 74 세로 병 없이 입적하였다.
도안이 불교사상에 끼친 공적 가운데 특기할 것을 몇 가지 들면,

(1) 5호 이후 경전의 번역은 연월을 따라 증가하나 시일의 경과에 따라 역자년대의 불명한 것이 점점 많아지고. 또 당시는 많은 개인의 사업으로 각처에서 역출한 것이므로 산실을 면치 못하였다.
도안은 이것을 우려하여 고심참담해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緣)을 저작하여 당시는 물론 후대에 많은 편리를 주었다.

(2) 도안은 이와 같이 목록을 작성하는 동시에 경전번역에 많은 힘을 써서 당시 장안에 온 범증의 역역에도 기어 번역사업을 도왔다.
이 시대는 역경이 유치하였기 때문에 경론을 강하는 자도 그 대의를 서술하고 경문을 전독할 뿐이요.
경문의 시종을 해석하고 그 진의를 찬양하는 자가 없었다.
도안은 이러한 부족을 깨달고 경론의 연구를 깊이하여 제경에 서를 지으며, 경전을 강술하는 동시에 기타 경전에 주석을 한 것이 많으니 <역대삼보기>에는 24부에 달한다고 하였고, 종래의 뜻이 통하지 아니한 것을 해명하여 경전 해석상에 다대한 공적을 남겼다.

(3) 다음은 승제작성(憎制作成)이다. 종래출가의 성은 출생국 혹은 스승의 성을 받았다.
예컨대 강맹양은 강거요, 지루가참은 월지이며, 안세고는 안식인 것과 같다.
그런데 도안은 출가가 모두 석존으로부터 시작하였으므로 석으로써 성을 할 것이라 하며, 이 이후는 모두 이것에 따랐다.

또는 승전의 행의방법으로 <승니궤범불법헌장> 3대를 제작하였다.

<중국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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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2/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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