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을 호국과 사원불사에 몸바친 상근, 윤호 두 스님

일생을 호국과 사원불사에 몸바친 상근, 윤호 두 스님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한국
• 시대 : 근현대
• 참고문헌 : 청룡사자지

상근(詳根)비구니는 이조 제26대 고종(高宗) 9년(서기 1872년) 9월 6일에 한서부 동부 이교동 남양(南陽) 홍영일(洪永日)씨의 4남매 중 2녀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충주 김씨였다.
상근비구니가 12세 되던 해 어머니께서 흥인문 밖 청룡사에서 계흔(桂晴) 스님의 상좌로 출가하여 법명을 창수(昌洙)라고 부르게 되자 그해 여름, 언니 되는 금전(錦專)이 어머니를 따라 어머니의 제자가 되었다. 상근비구니는 어머니와 언니가 모두 출가한 뒤, 아버지와 오빠 둘과 함께 집에 남아있었으나, 어머니와 언니를 그리는 마음은 날로 더해갔다.
마침내 2년 뒤인 고종 20년(서기 1883년, 癸未) 9월 24일, 상근비구니는 어머니인 창수비구니를 찾아 그를 스님으로 정하고 출가하였으니, 3모녀가 함께 스님과 상좌간이 되었으며, 그때는 나이 14살이었다.
상근비구니는 사미계를 개운사(開運寺) 극락암(極樂庵)에 계시던 초암(草雇) 노스님에게서 받고, 42세 되던 해 4월 8일에 금강산 유점사에서 윤영봉(尹靈峰) 율사에게서 비구니계를 받았다.
상근비구니는 천성이 영민하고, 체격이 건장하였으며, 마음이 활발하고, 지개가 헌앙하여 대의에 살고, 소절에 굴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듣고 보는 것은 모르는 것이 없었고, 불전의 법요의식(法要儀式)과, 간단한 예경승사(禮敬承事)는 말할 것도 없고, 어려운 범패(梵唄)에 이르기까지 남달리 뛰어나게 잘하였다.
그리하여 어떤 법요의식에나, 어떤 공양재식에나 모범이 되고, 칭송을 받았으며, 성격이 정중하고 치밀하여 매사에 소홀히 하거나 성실치 아니한 점이 없었다.
또한 신심이 견고하고, 공익심이 투철하여 가람(伽藍)수호와, 빈병(貧病)구제에 솔선수범하였고. 사생활에 있어서는 검박했으나, 부처님을 위한 사업이라면, 또 부처님 법을 넓히고 빛내는 일이라면. 만금을 아끼지 않고 기쁘게 보시하였다.
일생에 저축한 적지 않은 재산을 만년에 아낌없이 여러 사원에 희사 헌납한 것을 미루어 볼지라도, 그 근본 성격이 얼마나 활달하고 물욕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근비구니는 23세 되던 해(서기 1894년 任申)에 금강산 영원암(靈源庵)에서 처음으로 참선 도량에 입참하여 결제(結制)하였다.
그리고 몇해 동안 금강산 여러 선원에서 공부하다가 다시 청룡사로 나왔다.
그 후 40세 되던 해에 몇 상좌를 데리고 금강산 장안사 관음암에 들어가서 8년간 공부하다가 47세 되던 해에 청룡사로 나왔다.
청룡사에 나오자 즉시 역사를 시작하여 청룡사 큰 방채를 지었다.
이듬해 48세가 되던 해 기미년 3월 1일에는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평소에 남달리 애국심이 강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간절하던 상근비구니는 직접 자신이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전위에 서서 투쟁을 못할지라도, 물질과 정신양면으로 애국지사들을 적극 원조하고 격려하여 주었다.
민족대표의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인 한용운(韓龍雲), 백용성(白龍成) 두 분 스님을 위시하여 백초월·이종욱·신상완등(33인 뒤에 소위 48인 조직)여러 스님 뒤를 받들어 독립운동에 숨은 역할을 꾸준히 하였다.
만년에는 도제를 양성하고, 가람을 수호하고, 불사를 크게 이룩하고, 가난과 병에 신음하는 가엾은 사람에게 보시하고, 또 부처님을 위한 일과, 나라와 민족을 위한 일에 물질과 성력을 아끼지 않았다.
상근비구니는 61세의 회갑을 맞아(서기1932년, 壬申) 그 기념으로 누구에게도 희사 한 푼 받지 않고, 순전히 자비를 판출하여 청룡사를 일신 중창하였다.
그리고 일생에 근검절약으로 모아 두었던 재산 전부를 아낌없이 털어서 전국 유수한 사찰에 기부하였다. 상근비구니는 그 후 계속 청룡사에서 주석하다가 6·25동란이 일어난 이듬해 5월 21일 인시에, 열반하니 세수는 80세였다.
그는 격동하는 이조 말엽에 태어나서 주마등같이 변전무쌍한 사회적 생태를 가지가지로 체험하여, 남다른 종교관, 사회관과 생활철학이 있었다.
즉, 그는 임오군란(壬午軍亂)도, 갑신정변(甲申政變)도, 갑오혁명(甲午革命)도 을미사변(乙未事變)도 목격했으며, 을사조약(乙巳條豹)과 경술합방(庚戌合邦)도 눈물을 삼켜가며 당했던 것이다.
기미년 3·1운동도, 6·10만세도 몸소 체험하였고, 태평양 전쟁도 8·15해방도 고통과 질곡 속에 감격적으로 맞이 하였으며, 대한민국의 독립도, 6·25동란도 희비쌍주(喜悲雙奏)로 목격하였으니, 그의 80평생은 고난과 수난의 역경 속에 불굴의 의지로만 살아온 일생이었다.
그는 생을 도피하는 염세종교가나, 현실을 무시하는 형이상학적 철학자를 추종하지 않고, 냉엄한 현실 속에, 오직 의를 위하고, 공을 위하고, 남을 사랑하고, 나를 잊어버리는 보살행을 하였던 것이다.
상근비구니의 법호는 인월(印月)이었고, 후계 상좌로는 윤호·경화·대용·보현·보성 등 다섯 비구니가 있다.
사자굴에는 사자만 산다고 상근스님의 제자 윤호(輪浩)스님 또한 그의 스님에 못지않았다.
스님께서 생전에 모으신 재산을 통 채로 내놓고 의논하자
「스님은 스님복에 살고 저는 제복에 살 것인데 무엇 때문에 걱정하십니까?」
하여 철저한 자립정신에 불탔다.
스님은 이조 끝 임금인 순종(純宗) 융희(隆熙) 원년(서기 1907년) 11월 7일 해시(亥時)에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신원리 경주 김춘식(金春植)의 장녀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수성(水城) 최씨(崔氏)였고, 다섯 살 되던 해 3월 2일, 청룡사에서 상근(祥根)비구니를 스님으로 정하고 출가하였다.
그해 가을에 스님을 따라 금강산 장안사 관음암으로가 어린 시절을 대자연과 더불어 곱게 자라났다.
구슬처럼 밝은 깨끗한 물이 폭포를 이루고, 티 한점 없이 수려 우아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우뚝 솟은 바위들은, 어린마음에 경이와 경건한 마음을 샘솟게 하였다.
또한 상근스님의 자애에 넘치는 사랑과, 금강산의 신비와 경건한 교훈 속에, 천진난만한 어린시절을 기쁨 속에 보냈다.
그동안 강대련(姜大蓮) 스님에게서 사미계를 받았고, 12세 되던 해에 스님을 따라서 청룡사로 나왔다.
그해에 스님이 청룡사 큰 방채를 새로 지을 때에, 스님을 도와서 시봉하였다.
윤호비구니는 어려서부터 몸이 몹시 허약하였는데, 스님되는 상근비구니의 지극한 정성과 끝없는 사랑으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윤호비구니는 21세 되던 해(서기 1927년,T卵)에 어린시절의 꿈이 깃든 금강산을 다시 찾아 그해 여름을 저 신계사(神溪寺) 법기암(法起庵) 선원에서 지냈다.
그때 그 선원의 회주는 임석두(林石頭)스님이였고, 주지는 김탄월(金呑月)스님 이었다.
정묘(T卵)년 서기 1927년 여름 안거로부터 시작하여 그 해 겨울 안거, 그 이듬해 되던 기사(己巳)년에는 내금강 마하연(摩詞衍) 선원에서 회주 만공 월면(滿吏月面) 선사를 모시고, 여름 안거를 하였다.
그리고 그 해 겨울 안거는 내금강 유점사(楡岾寺) 반야암(般浩庵) 선원에서 만공선사를 모시고 마쳤고,
계속하여 이곳에서 만공 선사를모시고, 세 철 안거를 하고, 24세가 되던 경오(庚午)년 서기 1930년 10월 4일에는 만공선사로부터 백련(白蓮)이라는 법호와 계문을 받았다.

천당시환몽(天堂是幻夢)
지옥시환몽(地獄是幻夢)
몽각부하물(夢覺復何物)
두두백련소(讓頭白蓮笑)
천당도 꿈이로다.
지옥도 꿈이로다.
그 꿈을 깨고 나면 꿈 아닌 것 무엇일까.
어즈버 한 떨기 백련이 빙긋 웃음 짓노라.
25세 되던 신미(辛未)년 봄에는 금강산을 떠나서 청룡사로 나왔는데, 이때부터 스님을 모시고 사중 일을 보살피고, 스님시봉을 하면서 경을 읽고, 포교를 하고, 제자를 가르치고 하였다.
30세 되던 병자(丙子)년 3월 15일, 서울 안국동 선학원(禪學院)에서 권일봉(權日鳳) 율사(律師)에게서 비구니계를 받았다.
그리고 35세가 되던 해(서기 1941년, 辛巳) 여름에는 순례의 길을 떠났다.
승지(勝地) 고찰(古刹)을 참배하고 선지식을 친견하고, 도를 묻고, 법을 배우고, 하던 중에 번뇌를 쉬고. 망상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대산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찾아기도 하고, 상원사(上院寺)에 와서 현대 불교의 큰 기둥인 방한암(方漢巖) 선사를 친견하였다.
한암선사는 윤호비구니에게 묘각(妙覺)이라는 법호를 내리시고 다음과 같은 계문을 주시었다.

심블망취과거법 (心不妄取過去法)
역불람착미래사 (亦不貪着未來事)
불어현재유소주 (不於現在有所注)
요달삼세실공적 (了達三世悉空寂)
마음속에 망녕되이 과거의 법을 취하지 않고
또한 미래의 일을 탕하여 집착 않으며
현재의 모든 것에도 집착함이 없이
이렇게 3세를 알면 마음 비어지리라.

순례의 길을 떠난 발걸음은 몹시 가벼워 오대산·해백산·지리산, 경주·부여 등지의 명승고적과, 성지 거찰을 두루 참배하고, 37세 되던 해(서기 1943년, 癸未)에는 다시 오대산을 찾아가서, 한암선사의 회상에서 여름 안거를 하였다.
때는 해평양 전쟁이 절정에 달한 때라, 식량 사정도 어려웠고, 세상이 소연하여 어디에 가나 평안하게 앉아서 공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가을에 청룡사로 상근스님을 뵈오러 왔다.
스님은 윤호스님을 보고 무척 반가워 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상근스님은 퍽 노쇠하여서 슬하를 한시라도 떠나서는 안 될 형편이어서, 이제는 스님 시봉에 전심전력을 다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잠시라도 스님 곁을 떠나지 않고 효성을 다해 봉양했다.
39세가 되던 해 (서기 1945년, 乙酉) 8월 15일, 조국은 일제의 쇠사슬에서 해방되었으나, 무질서한 사회현상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혼란과 공포 속에서, 가람의 수호는 물론, 더 기력이 쇠진해 가는 스님의 봉양과, 사찰의 경영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44세가 되던 해(서기 1950년, 庚寅)에는 6·25동란이 일어나, 서울은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되었다.
공포와 전율 속에서도 스님의 안위를 위해 잠시 동안도 스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루하루 기력이 쇠진하여 가던 스님은 그해를 간신히 보내고, 이듬해 5월 21일 새벽 인시(寅時)에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스님을 잃은 윤호비구니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스님의 유언과, 대중의 간청에 의하여, 윤호비구니는 청룡사주지에 취임하고, 벅찬 살림과 많은 일들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윤호비구니는 어떻게 하면 스님의 뜻을 받들어, 청룡사를 잘 운영하고, 발전을 이룩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항상 마음속의 숙제였다.
그리하여 48세가 되던해(서기 1954년)에는 극락전 6간을 증축하였다.
옛날에 있던 극락전은 3간 이었으므로 너무 협소하여 불편을 느끼던 바, 이해에 6간을 더 늘여서 9간의 극락전을 만들었다.
또3년 후인 51세 되던 해에는 시왕전(十王殿) 6간을 중창하였다.
시왕전은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위(位)의 왕을 모신 곳으로, 사람이 죽으면 그 날부터 49일까지는 7일마다, 그 뒤에는 백일(百日)·소상(小祥)·대상(大祥) 때에 차례로 각왕(各王)에게, 생전에 지은 선악업의 심판을 받는다고 하는 곳으로, 고려 태조 5년(서기 雅2년, 壬午)에 청룡사를 처음 창건할 때부터 있었던 것인데, 순조 13년에 화재를 당한 후에는 다시 건축할 힘이 없어서 150여년 간을 빈터로만 내려 오던 것을, 윤호비구니 스님이 중창하게 된 것이다.
윤호비구니는 53세가 되던 해에 화사(畵師) 김일섭(金日燮)스님을 초청하여 시왕각부(1.진광왕, 2.초강왕, 3.송제왕, 4.오관왕, 6.변성왕, 7.태산왕, 8.평등왕, 9.도시왕, 10.오도전륜왕)
탱화를 조성하여 봉안하고, 요사 4간을 신축하고 밝은 건물을 일신 중수하였다.
또 시왕전을 지은 이듬 해(서기 1958년)3월 23일(丙子)에는 산신각(山神閣)을 신축하였다.
청룡사는 순조 13년 화재 이전에는 큰 규모의 승당이 있었으나, 화재를 당한 이후로는 규모가 큰 방을 건축할 힘이 없어, 10여간에 불과한 요사 한채만으로 150여년을 대중이 불편을 느끼면서 생활해 오던 것을 윤호비구니가 주지에 취임한 후 큰 승당 짓기를 원을 세웠더니, 숭인동에 거주하는 청신사 서병석씨(甲寅生)와 청신녀 반야행 최씨(癸丑生) 두 분에게 목재 등 시주를 받게 되었던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지극정성으로 불사가람을 이룩코자 하는 윤호스님의 원력을 어찌 저버릴 수 있겠는가.
또 그는 그해 9월 14 일 우화루(雨花樓)위 아래 21간을 상량하였으니 위에 충이 12간 반이고, 아래 층이 8간 반 이었다.
경자년 한해동안 승당(신검당)과 우화루등 두 채의 굉장한 건물을 한꺼번에 이룩한 것은, 모두 주지 윤호비구니의 신심과 불요불굴의 원력과 자비의 덕과 지공 무사한 성심의 결정 이었다.
우화루는 원래 청룡사를 처음 창건할 때부터 건축되었던 건물이었는데 중창할 때마다 고쳐 짓고 했던 것을 순조 13년 화재 때에 소실되어, 다시 건축하지 못하고 150여년간을 빈터로 내려오던 것을 주지 윤호비구니의 대원력(大願力)으로 새로 짓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지 스님이신 윤호 비구니는 절제(節制)와 계획성(計劃性) 있는 생활로서 청룡사 근처 임야(林野)및 대지(垈地) 수100평을 매입 (買入)하여 사찰의 기본 재산을 확충(擴充)하였다.
아무리 훌륭한 절이라도 터전이 없으면 마당 없는 집과 같기 때문이다.
이렇게 엄청난 땅을 마련하니 스승은 재(財)를 모아 그 스승의 전당을 분명하게 하니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아 ! 거룩하다. 이 두 스님의 일이 지금 동대문구 숭인동 17번지 청룡산 첫 정업원 구기(舊基)에 빛나니 만인의 빛이 되고 귀감이 된다.

<靑龍寺寺誌>

연관목차

774/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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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