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업원의 유래와 정순왕후의 불심

정업원의 유래와 정순왕후의 불심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한국
• 시대 : 조선
• 지역 : 경기도
• 참고문헌 : 이조실록

정업원(淨業院)은 이조 제 21대 영조대왕이 청룡사를 고쳐 부른 이름인데 원래는 세종대왕 때에 생긴 것이다.
이조 초엽에는 궁중에 부처님을 모시는「내불당(內佛堂)」이라 하는 법당이 있어 왕비이하 모든 궁녀들이 조석으로 이곳에서 예불하였다.
특히 세종대왕의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는 불교를 돈독하게 믿는 까닭으로, 궁중에서 불전기도회(佛前祈禱會)와 팔관재식(八關齋式)도 베풀어서 궁중에 불교 의식이 굉장히 성행하였다.
그 당시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들은 궁중에 내불당 두는 것을 마땅치 못하게 여겨내 불당 폐지의 상소를 여러번 올렸으나, 그때마다 세종대왕께서는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집현전학사들은 짐을 꾸리고
「상감께서 우리 유생들의 충간(忠諫)하는 말을 용납하지 않으시니 우리들이 있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모두 집현전을 떠났다.
세종대왕께서는 하는 수 없이 당신이 가장 신임하는 황희(黃喜·18년간 영의정)정승을 불러
「집현전 학사들이 참으로 나를 버리고 갔는가.」
하시고 매우 비감(悲感)하여 마지 않으면서
「내불당을 궁문 밖으로 옮기고 집현전학사들을 모두 오게 하라.」
고 하는 전교를 내리었다.
이리하여 궁중에 있던 내불당은 궁문 밖으로 옮겨나고, 불당 이름도 내불당이라 하지 않고 정업원이라 고치게 하였다.
그러나 내불당이 정업원으로 이름만 고쳤을 뿐 왕비나 비빈 궁녀들의 신앙적 귀의처로서의 도량으로는 변함이 없었다.
원래 정업원을 옮겨지은 곳은 금호문 밖(지금 원남동)이었는데, 연산군(燕山君)때에 이 정업원마저 없애버렸다.
처음 이 정업원이 생긴 뒤에 잠시나마 그곳에 몸을 의지하고 계신 분이 있었으니 이분이 바로 단종왕비(端宗王妃)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였다.
정순왕후가 잠시나마 정업원에 몸을 의지하고 있게 된 것은, 단종왕이 재위 4년되는 해(서기 1455년) 윤 6월 11일. 왕위를 숙부 세조(世祖)에게 선위(先位)하고, 사정전(思政殿)에서 수강궁(壽康宮)으로 나와서 이듬해 병자(丙子)년 6월까지 상왕(上王)으로 재위하던 1년 동안이었다.
이 동안 왕비 송씨마마는 날마다 정업원에 나가 부처님께 예불하고. 불경을 외우고, 죄업을 참회하고, 또 상왕의 만수무강을 비는 것으로 일과를 삼았다.
특히 송씨마마는 어릴 때부터 친정아버지로부터 불교에 대한 감화를 많이 받아서 평소 신심이 돈독 하였다.
단종왕이 수강궁으로 나온 지 1년이 되던 병자년 6월 27일,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등 사육신들이 단종왕의 복위를 피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한 후, 세조는 단종도 이 밀모에 가담되었다고 보고, 상왕을 폐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하고, 다음 날 영월 청냉포(淸冷浦)로 귀양 가게 하였다.
이때 왕비 송씨마마도 수강궁에서 청룡사로 나오게 되었고, 영조대왕은 이 고사에 연유하여 청룡사를 「정업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하였다.
송씨마마가 청룡사로 나오게 되자, 귀양길에 오른 노산군도 청룡사에 함께 들러 우화루(雨花樓 :청룡사 안에 있는 누각)에 잠시 머무르면서 송씨마마와 눈물을 흘리면서 최후의 작별을 하였다.
이 우화루에서 마지막 이별을 하였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은「우화루」를「영리정(永離亭)」즉「영원히 이별을 나눈 집」이라는 뜻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마침내 동네 이름까지 변하게 되었다.
송씨마마는 우화루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였으나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조차 할 수없는 단종왕의 뒤를 따라 영리다리까지 나가서 그 다리에서 한 많은 마지막 작별을 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은 이 다리를「영원한 이별을 나눈 다리」즉, 「영리교(永離滯)」라 이름하여 부르던 것을 그 후 차차 와전되어「영미다리」라고 불리어져 오고 있다.
송씨마마가 청룡사로 올 때 함께 나온 일행 5명은 모두 송씨마마를 따라 스님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시녀 세 사람은 법명(法名)을 각각 희안(希安)·지심(智心)·계지(戒智)라고 하여 송씨마마의 상좌가 되었으며, 후궁 김씨는 법명을 원경(圓鏡)이라 하였고, 후궁 권씨는 허경(努鏡)이라 하였고, 송씨마마는 허경 (虛鏡)이라고 하여 청룡사에서 제일 나이 높은 지진(智眞)비구니를 스님으로 정하고, 원경·혜경 두 비구니는 사제로 삼았다.
송씨마마는 청룡사에 나온 이후 바깥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일념으로 단종을 위해기도하고, 사중의 어려운 생활을 돕기 위해 자주물을 들여서 댕기·저고리깃·고름 끝동 등을 만들었다.
이렇게 자주물을 들여서 바위 위에 널어 말리고 하였으므로 이 바위를「자주바위」라 하고, 바위 밑에 있는 샘물을「자주우물」이라 하며, 마을 이름을 자주동이라 부르게까지 되었다.
송씨마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 없이 청룡사 앞에 있는 산봉에 올라가서 동쪽을 바라보고 단종의 귀양살이를 비통해 하였으므로 그 산봉 이름을 동망봉(東望峰)이라 이름 지었고, 후일 영조래왕(英祖大王)께서는「동망봉」이라는 어필(御筆)을 하사(下賜)하여 표석(標石)에 새겨 세우게 하고 그 애달픈 사연을 길이 위로하게 하였다.
그리고 야사(野史)에 의하면 송씨마마가 날마다 오르던 동망봉의 풀들은 춘풍 추우5백년이 지나도록 송씨마마의 한(恨)이 맺혀서 모두 동쪽으로만 고개를 숙였으니, 마치 송도(松都) 선죽교(善竹橋)의 정포은(鄭園隱)선생이 홀리신 피의 흔적이 오늘날까지 돌 위에 아롱져 남아 있듯이, 송씨마마의 단종왕을 그러던 애달픈 한은 동망봉 기슭에 뻗쳐 남아 동쪽으로만 고개 숙이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李朝實錄>

연관목차

771/1978
효선설화
호국설화
보은설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