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에 수 놓아진 서역불교

실크로드에 수 놓아진 서역불교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한국
• 참고문헌 : 호국불교의 이념과 실체

서역은 중국 사람들이 중앙아시아와 서부아시아를 통칭해 부르던 말로 지리적으로 엄밀한 구분은 없다. 좁은 뜻으로는 타림분지 즉 동터키스탄의 오아시스 도시 국가군을 가리킨다.
이 곳은 특별한 통치자가 없이 여러개의 부족국가가 활거 하였으므로 누구를 지목하여 호불왕이라 할 수 없으나 이곳의 불교가 동서사상에 끼친 영향이 크므로 여기 간단히 소개코저 한다.
漢대에 이르러 이 지역이 흉노의 지배하에 있었을 때, 이들 여러 나라들은 서역 36국이라 통칭되었다. 특히 서역지방이 중국의 對서방교역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 특정을 들어,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이 「실크로드」로 명명한 곳이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특산물인 비단이 서방에 반입되고, 서방으로는 보석과 직물이 들어왔던 동서교역의루트였지만, 무엇보다 서북이란에서 힌두쿠신 산맥을 넘어 터키스탄으로 들어가 타림분지를 통해 불교가 중국으로 전해진 경로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지역이다.
서역지방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왕 때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흥륭은 기원 1세기 인도의 굽타왕조 때였다.
굽타왕조는 인도서북에 있으면서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이때 불교도 급속하게 이 지역에 정착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서역에 들어온 불교는 주로 서북인도에서 전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언어와 풍속의 차이로 인도의 불교와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 양식이 다르다.
말하자면 서역불교라고 이름할 독특한 불교가 행해졌던 것이다.
중국에 전해진 불교도 초기에는 인도에서 직수입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서역불교를 수입한 것이다.
그것은 한역불전에서 사용한 술어 가운데 서역적 표현의 흔적이 많이 나타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중국 불교 전래기인 1세기에서 4세기 무렵까지 주로 서역출신의 승려들이 중국에 가서 역경에 종사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역경에는 지루가참(月氏國출신)·안세고(安息國=파트티아출신)·지호·강승회(소그드인)·축법호·구마라집 (구자출신)등이 유명하며, 불도징등은 중국에 와서 절을 짓고 경을 강론했다.
이 중 라집과 불도징은 중국 불교에 끼친 영향이 대단히 컸다.
중국에 직접 인도의 불교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인도인을 아버지로 둔 구마라집(350~409)이 401년 장안에 오고, 법현이 399년에 장안을 출발하여 인도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서역과 중국의 문화교류는 초기부터 당대까지는 서역이 일방적으로 중국에 영향을 끼치다가, 그 이후부터 늘 반대로 중국이 서역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불교는 처음에는 인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나중에는 오히려 중국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중국에 끼친 서역불교의 영향은 교학적인측면보다 신앙적인 측면이 더욱 강했다. 중국불교 초기에 유행한 미륵신앙과 이것에 뒤따라 일어나 미륵신앙을 압도한 미타신앙은 분명히 서역으로부터 영향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인도불교에서는 그다지 명좌하지 않던 불보살에 대한 신앙이 불교내부에서 일어나고, 발달한 장소가 이 지방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를 뒷받침할 자료로써 오늘까지 전해지는 미술품과 또 최근에 발간된 불경의 유편들이 있다.
20세기초 영국정청의 고고학자 스타인이 이곳에 와서 발굴한 유물들 가운데는 대승불교의 불보살들이 많으며 그 양식은 경교(그리스도교의 일파)와 마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있다.
돈황을 비롯한 많은 석굴유적군의 벽화나불상은 서역불교 미술의 절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미술품들은 간다라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나타나지만, 투루판 지역에 오면 중국미술과 혼합되어 돈황 ·운강·용문등을 거치면서 구조·소상·조각양식·존상의 종류·조각에 묘사된 복장·문양 등에서 그 양식의 변천을 엿볼 수 있다.
회화(벽화)의 주제는 주로 부처님의 전기나 본생담이 묘사되어 있고, 그 주변이나 천정은 작은 불상·친인상·꽃무늬 운주교등이 그려져있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복장과 문양은 인도적이라기보다는, 그리스·로마풍이나 이란풍의 것이 많은 것이 서역지방 벽화의 특색이다.
이들 석굴사원 예술품들이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불교 예술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아 4세기~8세기에 걸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역에서 발견된 불교문헌은 산스크리트어 원본과 서역 여러 지방의 방언으로 번역된 것 그리고 뒤에 한역된 티베트어역 경전이 포함돼있다.
이중 중요한 것은 산스크리트어 원본과 서역지방 방언으로 된 것이다.
돈황에서 발견된 산스크리트어 사본에는 파리어 경전에 대응하면서, 그것과는 달리 내용적으로는 한역에 알려진 소승 경전과같은 계통에 속해 있는 아함등이 있다.
그러나 비교적 수가 많은 것은 코탄어역으로 된 대승경전들이다.
금강반야경·반야이취경·무량수다라니·증가질경·수릉엄경·금광명경등이 그것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서역에서 행해진 불교는 중국의 것과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걸음 나아가 어떤 의미에서는 대승경전의 종합적 집성이 이곳에서 행해졌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예를 들면 80화엄경의 원본은 코탄어역 뿐이고 인도에서의 화엄경이나 왕적경의 단편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서역에서 집성했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 대승기신른의 경우도 인도에서 편집되었음이 의심되고, 그렇다고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면, 중앙아시아에서 편집되어 유행했다고 가정하는 것도 전혀 무리한 착상은 아니다.
이러한 문제는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고, 앞으로 보다 새로운 자료에 의한 연구의 진척에 기대해야 할 분야이다.
어쨌거나 중앙아시아의 불교가 대승불교의 발전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주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불교가 오랫동안 역사의 전면에 매몰돼 있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20세기초 돈황을 비롯한 실크로드가 문화사적으로 새로운 조명을 받기 시작하면서, 베일에 싸였던 화려한 불교문화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서역불교는 10세기 이전에 1세기간의 지방에 있었던 불교다.
9세기부터 이 지역에 침입한 회교도들은 인도에서와 같이 불교를 무차별 파괴하여 10세기 이후에는 지도적 위치를 잃고 말았다.
서역 즉 중앙아시아 지역은 현재 중공의신강자치구에 속해 있다.
따라서 현재의 불교상황은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서방에서 들어가는 여행자들에 의해 현재 이 지역의 지배적 종교인 마니교 속에 민속화 된 불교적 신앙의 요소들이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는 것만 전해질 뿐이다.

<호국불교의 이념과 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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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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