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보물 보로부도르가가 있는 인도네시아의 불교

세계의 보물 보로부도르가가 있는 인도네시아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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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호국
• 국가 : 기타
• 참고문헌 : 세계불교

인도네시아는 1만 3천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구성돼있다.
면적은 192만㎢ 이렇게 많은 섬들 가운데 사람이 사는 섬은 1천여 개도 안 된다.
유인도라 해도 수도 자카르타가 있는 자바와 수마트라, 술라바시섬을 빼고 나면 사람이 사는 둥 마는 둥 하는 상태다.
인구는 1억 6천 800여만명. 종족은 300을 헤아리며 그들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생활 관습으로 살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지배적이며, 그 다음이 힌두교. 기독교 순이다.
이에 비해 한때 이 지역에서 융성했던 불교는 유물만 남아 있을 뿐 거의 절멸한 상태다.
인도네시아의 고대사는 14세기 마차파히트왕국이 현재의 인도네시아 영역을 통합하기 전까지 수마트라와 자바가 별도로 발전했다.
따라서 불교도 그 이전에는 자바와 수마트라지역에서 나뉘어 발전했다.
인도네시아의 불교가 전해진 것은 1세기~5세기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이 기간중 인도네시아 각 섬에는 인도로부터 불교와 힌두교를 배경으로 한 문화가 전파했다.
5세기경에 인도를 순례한 법판(法販)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지역에서는 힌두교가 융성하고 불교는 미미했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에는 계빈국(카시미르)의 구나발마(369~431)가 찾아와 교화활동을 폄으로써 불교가 정착되었다.
8세기경에는 사이드라왕조(774~864)가 출현하여 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이 왕조는 말레이와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침공하여 수진랍을 전멸시켰다.
역대 왕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발전과 보호에 힘썼으며, 또한 불사를 많이 지었다.
이 지역에 펴진 불교는 밀교(密敎)를 주로 하는 대승불교로서 귀족적인 색채가 농후했다.
당시에 건립된 사원으로는 칼라산·멘두트 세부 등이 있으며, 유명한 보로부도르도 이때에 조영된 것이다.
이 사원은 어느 왕이 지은 것인지, 패 보로부도르라고 하는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석조사원의 규모로는 인도네시아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1814년 영국인에 의해 발견된 이 사원은 전체면적이 2천 580 ㎢나 되며, 정방형의1변은 111m에 이르고 있다. 기단으로부터 종모양의 탑까지는 9층 31m나 된다.
평면도를 보면 마치 거대한 만다나도(曼多羅圖)를 연상케 한다.
이 사원 내부에는 1천 460점의 불주(佛晝)와 1천 212점의 장식화, 그리고 505점의 불상이 각층에 고루 안치되 장엄한 불 세계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사원이 조영된 것으로 보아, 과거 이 지역에서의 불교가 어느 정도 흥왕했었는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0세기 경에는 신도크가 자바 지역에서 새 왕조를 세우고, 시바교를 보호하였다.
이후부터 이 지역에는 불교가 시바교와 혼융하여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편 수마트라 지역에서는 7세기 후반수리비자야왕국이 출현하여 급진적으로 발전해 갔다.
이곳에서는 불교상황은 당시 인도를 다녀왔던 의정(義淨)의 기록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의정은 681년에서부터 695년까지 수리비자아를 거처 인도를 왕복했는데, 귀로에는 약 10년간 이 나라에 머물렀다.
그가 번역한 근본설일절유부백일달마의 주기(根本說一切有部百一達磨의 註記)에따르면 이 나라에 수천의 승려가 학문과 수행에 힘쓰고 있었다고 한다.
또 그의 여행기인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의하면 당시 수리비자야에는 석가계률저(釋迦鷄栗底)라는 유명한 학승이 있었으며, 그는 수침론(手枕論)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이 책은 인도불교와 요가파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의정이 한역하여 전하고 있다.
수리비자야는 9세기부터 사러렌드라 왕조의 지배를 받기 시작하여, 11세기초까지 최성기를 이룩했다.
이 무렵에는 불교도 극성하여 동남아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11세기 초두에는 법칭(法稱)(찬드라키르티)과 같은 대학장이 나타나 불교홍보에 진력하였다.
그의 저술은 현관장엄론(現官莊嚴論)이라고 하는 반약경석논(般若經釋論) 주석에 있어서 난해어해명소(難解語解明疏)를 비롯, 입보제행논삼십륙섭의(入菩提行論三十六攝義)·입보제행논섭의(入菩提行論攝義)·집보살학논현관(集菩薩學論現官) 등 4종류나 된다.
이 중 첫 번째 것은 미륵의 (현관장엄론)에 대한 주석서의 난해한 용어를 해명한 명저로서 그의 주저이다.
그의 이름은 동인도 방면까지 널리 알려져서, 아티샤(982~l054)가 찾아와 20년간 연학(硏學)하기도했다.
아티샤는 나중에 티베트에 들어가 라마교를 개혁했으며 당시 불교학의 2대 중심지로 알려진 비크라마시라승원이 학장이 된 고승이다.
법정(法稱)의 저서가 티베트대장경에 들게 된 것도 아티샤가 티베트어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11세기 초엽까지 발전을 거듭하던 수리비자야는 1025년경에는 남인도 촐라의 침입을 받는 것이 실마리가 되어, 서서히 국세가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최전성기를 구가했던 불교도 왕조의 쇠망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 불교는 이후 라덴 비자야가1293년에 세운 마자파히트 왕조에 이르러 새로운 계기를 맞이했다.
대승불교의 밀교가 힌두교와 혼융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다.
특히 라덴비자야의 딸 자야비슈누 바르다니는 영명한 여왕으로 인도 신화의 라크슈미 여신(미와 지혜의 여신)의 화신이라 하여, 그들 일가를 신격화하고, 사원을 지어 불상과 함께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 같은 예는 인근 캄보디아의 경우에도 없지는 않으나, 이 경우는 왕들이 보살의 화신으로 칭송되어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인도신화에 나오는 신의 화신이라 할 때, 불교의 교의는 발붙일 수 없게 된다.
때문에 많은 불교사원은 힌두화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신앙의 형태도 이미 불교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샤먼화 된 불교>가 되고 말았다.
이 시대의 대표적 건조물은 장려하기 그지없는 찬디파나타란인데, 이곳에는 힌두교의 3대신을 모시고 불상은 힌두화된 것들이 전해질 뿐이다.
1938년 하얌우르크왕이 죽자, 마자파히트 왕조는 급속한 쇠망을 시작했다.
그 내인(內因)은 왕가의 왕위계승 쟁탈, 기근 등이었지만, 외인(外因)이었던 이슬람교도의 마자파히트침투는 결정적으로 이 거대한 힌두교 국가를 붕괴 시켰다.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이슬람교는 급속하게 교세를 확장했으며, 힌두세력과의 마찰도 셍겼으나 끝내는 굴복받아 1628년에는 사실상 이슬람국가가 성립됐다.
이 후 이슬람 세력은 자바와 수마트라 이외에도 보르네오 남부, 실레베스의 마카사르 몰루카제도, 필리핀군도 등 광대한 지역으로 퍼져 불교는 이 지역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말았다.
현재에도 이곳에는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세력이며, 약간의 힌두교와 새로 들어온 기독교가 신앙될 뿐 불교는 없다.
인도네시아에서의 불교 사멸은 불교가 본래의 교의를 잃고 세속화할 때, 필연적으로 망한다는 것을 교훈적으로 보여준 예다.
인도에서도 그랬지만. 인도네시아도 불교가 이슬람침입 이전에 힌두교로 흡수되어, 흔적초자 남기지 않고 사라진 점은 한국불교에도 좋은 교훈이 된다 하겠다.

<세계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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