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비구니의 기도와 후삼국통일

혜원비구니의 기도와 후삼국통일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한국
• 시대 : 신라
• 지역 : 경상도
• 참고문헌 : 청룡사자지

혜원비구니는 신라 제 46대 문성왕(文聖王) 13년 서기 851년에 계림부(鷄林部)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금성태수 중아손 김융(金城太守 中阿孫 金融)이요, 어머니는 경주 최씨(崔氏)였다.
아버지 김융이 신라 제 48대 임금인 경문왕(景文王) (서기 861~874년)이 승하(昇叢)하여 궁중으로 들어가는 도중 경문왕의 제3비 소생인 용덕왕자(龍德王子 : 弓裔)가 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구출하려고 하다가 상대 위홍(魏弘)등에게 몰려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역적 누명을 쓰고 죽게 됨에 가산이 탕진되고 집안이 적몰되는 바람에 혜원비구니는 24세의 젊은 나이로 몸을 태백산세달사(世達寺 :京畿 懷德에 있던 興敎寺)로 피하여 허담화상에게서 계를 받고 스님이 되었다.
이보다 앞서 혜원비구니는 18세가 되어서 화랑도(范郎徒)이었던 예흔랑(譽欣郎)에게 출가하였다.
20세 되던 해 예흔랑은 국선(國仙 :花郎)으로서 금강산에 들어간 뒤로 계속 소식이 없으므로 친정아버지 금성태수 김융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가 아버지 김융이 역적으로 몰려 죽으므로 몸을 세달사로 피하여 스님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몇해 뒤 우연히 용덕왕자 즉, 궁예(弓裔)가 세달사로 찾아와서 허담스님의 상좌가 되었다.
이렇게 됨에, 혜원비구니의 아버지는 용덕왕자를 구하려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었는데, 그 왕자가 불문에 법형제가 되었으니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세달사에 있는 동안 혜원비구니는 용덕왕자인 태허스님을 극진히 아끼고 보호하였다.
신라 제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5년에 나라가 어지럽고 각지에 반란이 일어나자 용덕왕자인 태허스님은 스님의 수도생활에서 인연을 등지고,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다시 양길의 부하가 되어 중을 세우고 진성여왕 8년(서기 894년 甲寅)에는 명주(溟州)·철원(鐵置.鐵原)을 함락한 뒤 독립하여 장군을 자칭하고, 이듬해 강원도 일대를 세력권 아래에 두어 나라의 규모를 갖추었다.
신라 제 52대 효공왕(孝恭王) 5년 (서기901년)에는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을 때에 궁예왕은 옛날 정의를 잊을 수 없어 세달사에 있는 혜원 비구니를 자주 찾아갔다.
혜원 비구니의 나이가 57세 되던 해(서기907년)에 궁예왕은 혜원 비구니를 청하여 철원의 화개산에 있는 도피안사(到被岸寺)에 주석(住錫)케 하고 가끔 궁중으로 모시어 연석(宴席)을 배설하고 공양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 때 혜원비구니는 왕비 난영(蘭英)이와 친밀하게 되고, 왕비 난영의 소개로 궁예왕의 신하인 왕건을 알게 되었다.
그 뒤에 궁예왕이 죽고 왕건이 고려의 태조가 되어서, 즉위 5년(서기 922년)에 청룡사를 창건하고 칠원의 도피안사에 있던 혜원비구니를 청하여 제 1세 주지로 주석케하였으니, 그때 혜원비구니 나이는 72세였다.
고려 태조 즉위 17년(신라 경순왕 8년 서기 934년)1월 1일부터 혜원비구니는 왕명을 받들고 청룡사에서 삼한통일(三韓統-) 위축 천일기도를 시작했다.
이 기도를 시작한 동기는 고려의 태조 왕건은 신라경명왕 2년 6월에 철원에서 왕위에 나아가고 국호를 「고려(高麗)」라 고쳤으니 그 때 한반도의 형세를 보면, 신라에는 제 54대 경명왕 2년이요, 전라도 전주에서 도읍한 견훤(甄萱)은 나라 이름을「후백제(後百濟)」라 자칭하고 왕이 된 지 27년이라, 좁은 반도는 다시 세 쪽으로 나뉘어졌으니, 통일을 염원하는 왕건 태조의 꿈은 불같이 간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태조는 이의 성취를 위한 기도를 가장 신임하는 혜원비구니에게 명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지 바로 이듬해 을미(乙未)년 6월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부자(父子)사이에 반목이 져서 고려에 항복하여 들어오고, 또 그 해 10월에는 신라의 경순왕이 군신회의(君臣會議 . 和白會議)를 열어 국토를 전부 고려에 양부(讓附)하였으며, 또 그 다음해 병신(丙申)년 9월에는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이 고려에 항복하여 왔다.
그리하여 왕건 태조는 즉위한 지 19년 만에, 또 청룡사에서 삼국통일의 위축 기도를 올린 지 2년 만에 삼국을 완전히 통일하였다.
왕건 태조는 창업을 이룩한 것이 모두 불보살(佛菩薩)의 가피력이요, 또한 청룡사주지 혜원비구니의 기도 정진한 힘과 이 청룡사 도량의 영험이 크다고 믿고 청룡사에 후한 상을 하사함과 동시에 나라의 큰 위축기도를 청룡사에서 올리도록 하였다.
이렇게 혜원비구니는 왕건 태조의 명을 받들고 청룡사로 와서 16년이란 세월을 지내다가 삼국통일이 이룩되고 3년 만인 무술(戊戌)년에 세수(歲壽) 88세로 입적(入寂)하였으니 때는 고려 태조 21년(서기 938년) 이었다.

<청룡사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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