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과 항거의 베트남 불교

투쟁과 항거의 베트남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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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호국
• 국가 : 기타
• 참고문헌 : 동남아불교

1963년 5월 29일은 일요일이었다.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사이공의 판딘풍 거리를 황색법의의 비구와 회색법의의 비구니가 조용한 저항의 표정으로 가두진행을 하고 있었다.
거리의 어디쯤에 행렬이 멈췄다.
스님들은 흐느끼듯 염불을 시작했고, 73살의 쾅둑 스님은 아스팔트 위에 坐禪의 자세로 앉았다.
한 스님이 5캘론짜리 휘발유를 쾅둑스님의 머리 위에 부었다.
그때 쾅둑스님은 스스로 성냥을 꺼내 불을 당겼다.
갑자기 광둑스님은 불길 속에 휩싸였다.
베트남불교의 한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 광신공양(鑛身供養)(세상에서는 이를 분신자살(焚身自殺)이라고불렸다.)
은 정부의 불교탄압에 베트남 불교도가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쾅둑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일주일 사이월남에서는 9명의 비구·비구니가 불교탄압에 대항해 분신자살을 했다.
이에 앞서, 그 해 5월 8일 후에는 9명의 불교도가 디엠정부의 발포로 학살된 사건이 있었다.
가톨릭 신자였던 디엠은 佛旗게양을 불법이라고 했으며, 가톨릭과 불평등하게 대우했다.
이에 반대하는 불교도는 체포됐으며, 의식 수행과 전도의 자유가극도로 제한됐다.
이에 대한 불교도의 저항은 맹렬한 것이었으며 마침내 분신자살, 트리 쾅의 지도에 의한 반정부운동으로 치달았다.
1975년 4월 30일 패망하기 직전 베트남인구는 1천 600만명 (월맹은 2천 160만명), 그중 40%이상은 불교도였다.
가톨릭은 170만명 밖에 안 되었다.
가톨릭은 제 2차 세계대전 전까지 프랑스의 통치아래 보호를 받아 성장했다.
이로 말미암아 전통종교였던 불교는 도교·유교와 함께 뿌리가 뽑혔다.
프랑스 식민주의자는 각사원의 승려수를 제한했고, 새로운 佛事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대항해 베트남 불교도는 1920년부터 불교재흥을 시도하여, 1931년에는 최초로 사이공에서 불교연구위원회를 창설했다.
유사한 위원회들이 1932년에는 후에에서,1934년에는 하노이에서 창립됐다.
불교단체는 일본이 베트남을 장악했던 2차대전 동안 말없이 잔존해오다가, 1945년 승려그룹이 식민주의를 대항하는 불교조직(Phat Giao Khan Chien)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던 목적이 달성된 1954년에 해체됐는데, 대부분의 불교도는 반프랑스 조직의 맴버였다.
전후(戰後) 베트남 불교의 부흥은 1951년 5월 50명의 승려와 평신도가 참석한 국민 불교회의가 후에에서 개최됨으로써 시작됐다.
이 모임은 승단(僧團)을 재조직했고, 불교의식을 성문화(成文化)했으며, 불교청년그룹 조직과 성인교육센터를 설립했다. 베트남 불교도들은 또한1950년 콜름보에서 창립된 세계불교도대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45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17도선을 경계로 북부와 남부가 분리되고, 고딘디엠이 남부에서 정권을 잡게 되자 베트남불교는 새로운 시련을 맞게 되었다.
디엠정부가 가톨릭과 불교를 차별대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불교는 식민치하에서는 프랑스에 적대하기 위해, 그리고 나중에는 胡志明의 공산주의에 대항키 위해 결합했던 가톨릭과 결별하고 격렬한 반정부노선을 걷게 되었다.
이같은 강경노선은 군사쿠데타에 의해 티우, 키와 같은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해서도 계속됐다.
그들은 계속해서 불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비해 반정부지도자 트리 쾅스님은고 지적하면서, 불교탄압은 곧 민주주의 세력의 탄압이라고 정부를 공격했다.
그의 말은 옳은 것이었다.
베트남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중국의 지배가 시작된 1세기경부터였고, 이후 불교는 베트남의 가장 중심적인 종교였다.
인도차이나반도 동부에 위치한 베트남은 참족이 먼저와서 살고 있었으나, 기원전 4세기경에 절강성에 있던 越나라의 멸망과 함께 월의 여러 부족의 남방으로 이동하여 참족을 밀어내고 통킹 지방에 정주하면서역사를 시작했다.
월남이란 말은 중국에서붙인 말로 越의 한 派란 뜻이다. 월남은 나중에 안남(安南)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치사적으로 토킹지방은 기원전 3세기경 말에 광동(廣東)서 성립된 조왕조(趙王朝)의 보월국(甫越國)에 소속되었으나, 기원전 111년 한무제(漢武帝)의 토벌을 당하여 남월(南越)이 한(漢)에 병합됨과 함께 베트남 또한 漢의 지배를 받게 됐다.
중국의 베트남 지배는 10세기까지 1천년동안 계속됐으며, 그 사이 중국 문화가 이곳에 깊숙히 침투, 정착되었다.
불교는 중국의 영향, 특히 한나라 말기 때부터 당나라 중엽 때까지는 북부 베트남에 대승불교가 보급되었으며.
남부 베트남에는 인도문화의 영향을 받아 태국이나 캄보디아로부터 상좌부 불교가 전해졌다.
이처럼 대소승의 불교를 고루 받아들인 예는 동남아에서는 드문 일이다.
베트남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사람은 후한 말 리혹론(理惑論)을 쓴 모자(牟子)(165-253)라는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당시 어지러웠던 전란을 피해 통킹(交跳) 지방으로 이주해와 불교를 전파했다.
그러나, 베트남이 중국과의 문화교류가 그 이전부터 있어온 것을 고려하면, 이때 최초로 전해진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쨌거나 모자는 베트남불교사에 최초로 이름이 나오는 인물이다.
베트남에서 선(禪)의 비조(鼻祖)는 비고다류지(毘雇多流支)라는 인도승려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남인도 사람으로 580년 교주(交州)로 와 중선사(衆善寺)에서 선(禪)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가 교주(交州)로 오기 이전에는 이미 고주(古株)의 법운사(法雲寺)에는 연관선사(緣觀禪師)가 선을 가르쳤다고 하나 영향력은 크지 않았던 듯하다.
비니다류지는 원래 중국의 장안(長安)으로 들어갔으나(574), 마침 북주(北周)의 파불(破佛)이 있던 때여서 努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중국선종의 三祖인 승찬(? ~606)을 만나 달마선을 배웠으며, 숭찬의 권유로 광주(廣州)로 내려가 6년간 제지사(制旨寺)에 머물면서 상두정사경(象頭精舍經)·업보차별경(業報差別經)을 한역하고, 다시 교주(交州)로 내려가 베트남 승려들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그 딘에는 300명이 넘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 뒤를 이은 사람은 법현(法賢)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처음에 법운사(法雲寺) 연관(緣觀)선사 밑에서 불도를 닦다가 나중에 비니다류지(毘尼多流支)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 법맥은 법등(法燈)에서 청변(淸弁)으로 이어 졌다.
비나다류지 선(禪)은 9세기 이후 무언통(無言通)에 의해 비롯된 무언통파(無言通派)와 나란히 이조말기까지 법맥을 지켜왔다.
비니다류지 계통의 선(禪)이 이렇게 베트남불교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청변의 탁월한 인물됨 때문이었다.
그는 12살 때 보광사의 법등 앞으로 출가해 김강반약경(金剛般若經)을배우고 금강경을 중심으로 선(禪)을 공부했다.
법등이 입적한 뒤 그는 다시 숭업사(崇業寺)의 혜엄(惠嚴)문하에 들어가 선을 배웠는데, 이때 비니다류지의 선은 중국 남돈선(南頓禪)의 법풍을 받아들여 완전한「베트남선」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불교가 본격적인 개화를 맞는 것도 이 무렵이다.
당唐(은) 679년 이 지역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部)를 설치하고 베트남을 지배했는데, 이때 중국에서 본격적인 대승불교의 선이도입 된 것이다.
중국 남돈선(南頓禪)은 이후 베트남에 새로운 계통으로 다시 한 번 전해졌다.
마조도(馬祖道)-의제자 백장회해(百丈懷海)(補O~8려)에게서 공부한 무언통(無言通)이라는 사람이 그 주역이다.
그는 이름에서 보듯 과묵하면서도 다방면에 거처 깊은 지식을 가졌던 인물이다.
백장아래서 수년간 선을 공부하고, 베트남으로 돌아와 건초사(建初寺)를 짓고 그곳에서 선법(禪法)을 선양하다가 826 년 입적했다.
이 계통의 선을 무언통파(無言通派)라고 하는데 그 후, 이 계통의 법맥은 400년간 비니다류지파와 나란히 계승되다가 비니다류지파의 선맥이 끊어진 뒤에는 100년간 베트남 선불교를 지배했다.
이후 무언통파는 진조(陳朝)의 성종(聖宗)(1258-1278)대에 일어난 죽림파(竹林派)에 그 맥을 계승시켰는데, 죽림파는 중국선을 베트남 풍으로 변화시켜 13세기 이후 오렛동안 베트남 불교계를 풍미 했다.
당(唐)지배 시대의 베트남에는 많은 구법승(求法僧)과 도내승(渡來僧)들이 머물면서 중국과 인도의 교류접점을 이뤄 최신의 불교지식이 항상 새롭게 넘쳐흘렀다.
승가발마(僧伽跋磨)는 이곳에 머물면서 대기근을 만나 허덕이는 베트남 민중에게 음식과 의약품을 제공하고 고아를 양육해 상청(常晴)보살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중국의 지배는 10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당의 멸망과 함께 베트남은 독립의 기회를 얻었다.
938년 베트남의 오권(吳權)은 비크. 당강 싸움에서 당시 남중국의 지배지였던 서한군(西漢軍)을 쳐부수고 오조(吳朝)를 열었다.
그러나 오조(吳祖)는 단명으로 끝나고, 그 뒤를 이은 정조(丁祖)나 여조(黎祖)에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세의 어지러움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계속 발전했다.
특히 이 무렵에는 베트남 최초로 승관제(僧官制)가 확립되어 승려가 정치에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고승들의 정치참여가 불교에 큰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승려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베트남에서 가장 선진적인 승려들은 선진 중국으로 유학했고, 또 중국 승려들이 이곳으로 오는 등 교류가 빈번했고, 학문이나 사상에서 숭려들은 지도적 위치에있었다.
吳·丁·黎朝의 위정자들은 이같은 승려들의 견문과 학식, 경륜이 필요로 했고 승려들도 기꺼이 위정자들을 보필했다.
베트남이 혼란기를 지나 최초의 완전한 독립국가를 이룬 것은 1009년 리공온(李公蘊)에 의해 열린 李朝 때부터이다.
국호를 대월(大越)로 칭한 이조(李朝)는 승룡(昇龍)(현재의 하노이)을 수도로 정하고, 1225년까지 베트남 최장기의 왕조를 유지 했다.
이조(李朝)는 불교를 보호하여 많은 절을 짓고 승려들을 보호했다.
특히 太朝(이공온)는 창업추시 10개의 사찰을 지어 불교를 훙륭시키는 한편, 宋에 사절을 보내 대장경을구입 하기도 했다.
이 무렵 비니다류지파의 제 12대 조사 만행(萬行)은 국사의 지위에 올라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는데 깊이 관여했다.
또 이 파의 13대조사 혜생(惠生)도 태종(太宗)의 귀의를 받아 정치를 자문하고 왕에게 선(禪)을 가르쳤다.
李朝는 3대 왕인 성종(聖宗) 때는 초당(草堂)이라는 선승이 중국에서 돌아와 초당파를 확립했다.
그는 성종의 귀의를 받고 정치 자문을 하는 한편 후진을 양성해 나중에 무언통파와 함께 선계(禪界)의 주류를 이루었다.
2세기 동안 계속된 이조의 뒤를 이어 성립한 진조(陳朝)는 베트남사상 가장 화려한 문화를 창조했다.
진조(陳朝)는 한자를 이용해 <츄놈>이라는 문자를 창만했으며, 이로 인해 불경이 번역되고 불교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시대 불교의 특이한 점은 세 번째 임금 인종때, 무언통파에서 나온 죽림파가 임제선의 전통을 계승케 된 것이다. 마침, 이 무렵에는 중국에서 元이 일어나 중원을 병탄해 갔는데. 베트남은 전후 8년간 항전하여 원을 퇴각시켰다.
이 전쟁을 담당한 인종은 나중에 스스로 출가해 죽림대사라 칭하고, 무언통파 17대 조사 각충(慤忠)의 뒤를 이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죽림파는 이후 베트남 선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세력이 되었다.
진조(陳朝)가 망하고, 후여(後黎)가 성립(1428)하자, 불교는 크게 후퇴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후여(後黎)는 중국 明의 영향을 받아 유학을 크게 숭상했으며,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불교는 쇠미현상이 뚜렷했다.
특히 후려의 성종은 전국에 사찰을 새로 짓는 것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1461), 사영(寺領)을 엄격히 제한했다-왕조가 불교를 외면하는 정책을 취하자, 불교는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형태로 변모해 갔다.
죽림파는 선보다는 정토적 색채를 강하게 보였으며, 중국 송대에 일어난 백련교가 도입돼 염불과 밀교적 색체를 베트남 고유의 민간신앙과 결합시켰다.
겉으로는 임제선을 표방하는 듯했지만, 내용으로는 정토염불이 중심이었다.
베트남불교는 이때부터 정토교의가 신앙의 중심으로 이루었다.
이후 베트남은 잦은 정변으로 막씨(莫氏)→등노(鄧駑)→보조(甫朝)로 바뀌다가 원조(院朝)로 넘어 갔다.
이시기에 민중들은 전쟁과 정변에 혐오를 느껴 내세왕생(來世往生)을 희구하는 풍조가 일어나고(아미타경)·(무량수경)이 번역돼 정토교는 더욱 확실하게 뿌리를 내린다.
이는 불교가 민족주의 세력과 결합하는 기반이기도 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베트남은 서구 식민세력과 서구 식민세력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900년 라오스·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령(佛領) 인도차이나로 규합되면서, 정치적 독립은 또다시 어려움에 빠졌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독립동맹은 8월 혁명에 성공, 진조(院朝)를 무너뜨리고 외세로부터 조국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프랑스는 다음해 다시 베트남을 지배하려고 전쟁을 시작했고,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은 이에 항전해 마침내 1954년 완전 승리했다.
그러나 이국의 개입으로 베트남은 남북으로 갈라져 60년대에는 다시 세계사에<베트남 전쟁>으로 기록되는 전쟁에 들어갔다.
이 무렵 남부베트남에서는 반민족적 국가독재정부가 불교를 탄압했다.
프랑스 지배시대에 들어온 가톨릭으로 개종한 군부지배자들은 민족주의 세력의 대표적인 불교탄압과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1963년 남부베트남 불교도들은 반정부운동을 전개하여 숱한 희생을 치르며 10개월 만에 군사정부를 무너 뜨렸다. 그러나 결과는 엉뚱하게 발전했다.
정국의 혼란은 전쟁을 폐해로 몰고 갔다.
독재는 무너뜨렸으나 1975년 베트남 전쟁 종식 결과함께 불교의 탄압도 가일층 강화된 것이다.
공산화 이후 베트남의 불교는 정부에 의해 일체의 종교 활동을 중지당하는 호심한 탄압을 받았다.
불교도들은 보트피플이 되어 외국으로 탈출했으며, 이들은 지금 세계각처에 흩어져 조국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동남아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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