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왕사의 지혜와 이성계의 건국

무학왕사의 지혜와 이성계의 건국

분류 문학 > 불교설화모음 > 호국설화

• 주제 : 호국
• 국가 : 한국
• 시대 : 조선
• 참고문헌 : 이조실록

청룡사를 제 4차로 중창한 무학(無學) 왕사의 휘(諱)는 자초(自超)이고, 호는 무학이며, 때때로 계시던 집 호는 계월헌(溪fT軒) 이라고도 하였다.
고려 제 27대 충숙왕(忠齋王) 14년(서기1327년) 9월 20일에, 경상도 삼기군(三崎郡 . 狹三郡)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숭정대부 문하시랑(崇政大夫下侍郎) 박인일(朴仁一)이요, 어머니는 고싱(固城) 채씨(蔡氏)로서, 현모다운 미덕을 갖춘 부인이었다.

하루는 어머니 채씨가 하늘에서 아침 태양이 품속에 안기는 꿈을 꾸고 무학 왕사를 잉태하였다.
무학왕사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여, 글을 배우는 데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고, 무슨 일에나 앞을 섰으며, 남의 뒤에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18세 때에는 홀연히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속세를 떠나 출가할 뜻을 가지고, 혜감(慧鑑)국사의 상수제자 되는 소지 (小止)선사를 찾아가서 구족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용문산에 있는 혜명(慧明)국사를 찾아가서 법을 배웠고, 법장(法藏)국사를 찾아가 뵈옵고 밝은 길을 얻었다는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부도암(浮圖庵)에 머물면서 정진하였다.

하루는 부도암에 뜻하지 않은 불이 나서 암자가 다 타게 되였다.
대중은 모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허둥지둥할 때에 무학왕사는 홀로 목석과 같이 태연히 앉아서 좌선에만 골몰하였다.
대중들은 이것을 보고 이상히 생각하였을 뿐 아니라 불법을 크게 일으킬 재목이라 감탄하였다.

무학왕사는 21세 되는 충목왕(忠穗王) 2년(서기 1346년, 丙戌)가을에 능엄경(楞嚴經)을 읽다가 문득 깨달은바 있어, 그 깨친 바를 스승인 혜명국사에게 여쭈었더니, 혜명국사는 그 뛰어난 경지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그 뒤로부터 무학왕사는 밥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잊고, 힘써 수도하는 동안 23세가 되던 기축(己丑)년 가을에는 진주(鎭州)의 길상사(吉祥寺)로 옮겼고, 26세 되던 임진(壬辰)년 여름에는 묘향산(妙香山) 금강굴(金剛窟)로 가서 잠이 오면 송곳으로 다리를 찔러가면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렇게 하는 동안 무학왕사는 의문 나는 점을 확연히 풀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하루는 금강굴에서 자다가 새벽 종소리를 들고 흘연히 크게 깨친 바가 있었다.
그는 그 깨친바를 증명 받고자 고명한 스승을 찾아서 여러 곳을 다녔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마침내 27세가 되던 고려 제 31대 공민왕 2년(서기 1353년, 癸巳)에는 단신으로 원(元)나라 연경(燕京)으로 가서, 인도스님인 지공(指空) 선사를 만나게 되었다.

무학왕사는 지공선사를 찾아가서 합장 예배드리고서 말씀드리기를
「3천 8백리를 와서 화상의 면목을 친견하였습니다.」
라고 하니까 지공선사가 대답하기를,
「고려사람은 모두 죽었도다.」
지공선사의 이 말은 무학왕사의 법력을 인가한 말이었다.

다음 해 정월에는 당시 고려의 산풍(禪風)을 원나라 서울에서 떨치고 있던 나옹(懶翁 惠動) 선사를 법천사(法泉寺)로 들러 친견하고, 법을 문답하였다.
나옹선사는 무학왕사를 한번 보고, 그가 큰 그릇임을 인정하여, 서로 늦게야 만나게 된 것을 애석히 여겼다.
얼마 뒤에 무학왕사는 원나라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서「무령산(霧靈山)」과,「오대산(五臺山)」 등을 두루 구경하고, 다시 서산(西山) 영암사(靈岩寺)에 돌아와서, 나옹선사를 두 번째로 찾아뵈옵고 여기에서선사를 모시고, 침식을 잊고 일심전력 공부에 힘썼다.

어느 날 나옹선사는 무학왕사를 보시고 희롱삼아 말씀하셨다.
「그대는 타국에 와서 죽으려고 밥도 먹지않는가?」
무학왕사는 그저 웃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그 뒤 또 어느 날 나옹선사는 무학 왕사와 함께 돌 위에 앉아 계시다가 무학왕사를 보고 물었다.
「옛날조주(趙州)선사가 수좌를 데리고 돌다리를 구경하시다가 수좌에게 물기를 <이 다리를 누가 놓았는고?>하니까 수좌가 대답을 못하였으니, 만일 오늘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무학왕사는 아무말 없이 뜰에 놓인 돌을 번쩍 치켜들어 보이니 나옹선사는 말없이 일어나서 가시었다.

그날 밤 무학왕사는 조용히 나옹선사가 계시는 방으로 선사를 찾아갔다.
나옹선사는 찾아온 무학왕사를 보시고 말씀하기를
「오늘에야 내 비로소 그대를 속이지 않을 것을 알았네, 온 천하에 서로 얼굴 아는 사람이 많기도 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대와 나는 한집(一家)일세, 도(這)가 사람에게 있는 것은 코끼리가 어금니를 가진 것과 같으니, 아무리 감추고자 하여도 감추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일세.
다른날 그대는 어찌 남의 앞에 물건이 될 수 있겠는가?」
이 말은 무학왕사의 도가 아무리 감추려고 하여도 저절로 나타나 여러 사람을 교화한다는 것을 말하여준 것이다.

그러나 무학왕사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의 큰 의심이 확연히 풀리고 크게 깨달은 바 있었으나, 여가에 더욱 뜻을 두어 중국 땅의 명산대찰을 찾고, 선지식과 좋은 도반을 친견하면서 법을 묻고 도를 닦았다.
그리고 절강(淅江)·강소(江蘇)등의 남방불교를 직접 찾아보고자 남방으로 내려갔으나, 그때 마침 남방에 난리가 일어나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할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무학왕사는 30세가 되던 고려 공민왕 5년(서기 1356년, 丙申)여름에 나옹선사를 찾아뵈옵고 고별의 인사를 드렸다.
나옹선사는 석별의 정을 표하면서 이런 법어(法語)를 써주었다.

觀其 日用全機與世有異 不思善惡正邪
관기일용전기여세유이 불사선악정사
不順人情義理 出言吐氣如箭烽相主句
불순인정의리 출언토기여전봉상주구
意合機似水歸水 一口呑却賓主句 將身透 過佛祖關
의합기사수귀수 일구탄각빈주구장신투 과불조관

그리고 또 작별의 시 한 수를 따로 써서 주었다.

이신낭중별유천 (已信囊中別有天)
동서일임용삼현 (東西一任用三玄)
유인문이참심의 (有人間爾參尋意)
타도면문갱막언 (打倒面門更莫言)

무학왕사가 귀국한 뒤 곧 이어서 나옹선사도 지공선사에게
「삼산양수(三山兩水)의 자리에서 불교를 크게 일으키라.」
는 부탁을 받고 돌아와서, 경남 양산군(山郡) 상북면 천성산(天聖山)의 원효암(元曉庵)에 주석하게 되었다.
이때 무학왕사는 찾아와서 문안 드리니 나옹선사께서는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불자(佛子) 한 개를 주시면서 법을 전해주는 신표(信標)로 삼노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무학왕사는 명실공히 나옹선사 법통(法統)을 이어받은 제자라는 것을 천하에 선포하게 된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받들었다.

그 뒤에 나옹선사가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로 옮기게 되자 무학왕사도 함께 따라갔다.
무학왕사는 여기에서 나옹선사를 모시고, 오랫동안 있을 생각을 갔었으나, 나옹선사의 제자들 가운데에 무학왕사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것을 눈치 챈 무학왕사는 나옹선사에게 하직하고 지체 없이 문하를 떠나게 되었다.
떠날 때에 나옹선사는 무학왕사에게 이런 말씀을 하였다.
「의발(衣鋒)을 전하는 것은 언구(言句)를 전하는 것만 못한 법이니, 그러므로 내 사구(四句)의 시를 지어주노니 길이 의심을 끊어라.」
하시고 다음과 같이 시 한 수를 써주었다.

분금별유상량처 (分漂別有商量處)
수식기중갱의현 (誰識其中更意玄)
임이제인개불가 (任爾諸人皆不可)
아언투과공겁전 (我言透過空劾前)

무학왕사는 나옹선사의 문하를 떠나서 여주 고달산(高達山)에 들어가 조그만 초암을 짓고 지내다가, 다시 안변 설봉산에 들어가서 토굴을 짓고 지냈다.
이 때에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동북면도 원수로 안변에 주재하였다.

어느 날 밤에 이성계가 꿈을 꾸니 천집(千家)의 닭이 일시에 울고, 천집의 방아(臼)가 일시에 찧어 보이고,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깨어지고, 헌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椽木) 셋을 지고나와 보였다.
이성계는 이 꿈의 사연이 하도 기이하여 이웃 마을에 사는 해몽 잘하는 노파를 찾아왔다.

마침 찾아간 노파는 집에 없었고, 노파의 딸만 집에 있다고 찾아온 이성계를 보고 물었다.
「무슨 일로 이렇게 오셨습니까?」
「너의 어머니가 집에 있었으면 해몽을 청하려고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오늘 집에 없어서 헛걸음을 했구나.」
대답하니, 노파의 말이 이 말을 들고 하는 말이,
「소녀도 어머니 못지않게 해몽을 잘 하오니 꿈 이야기나 하십시오.」
하였다. 이성계는 지난밤에 꾼 꿈 이야기를 자세히 말하였다.

노파의 딸은 이성계의 꿈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다가 말하였다.
「아뢰옵기 죄송하오나, 그 꿈은 흉몽이라 크게 불길한 일이 있을 징조이오니, 매사에 조심함만 같지 못하리라.」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꿈을 팔고 기분이 좋지 못하여 힘없이 돌아오다가 길 가에서 해몽 잘하는 그의 어머니를 만났다.

노파는 깜짝 놀라면서,
「어디서 이렇게 오셨다가 가시는 길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성계가 찾아간 경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말하였다.
노파는 이성계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그 꿈 참으로 좋은 꿈입니다! 지금 바로 우리 집에 저와 함께 가셔서 딸년 뺨을 때리고 꿈을 물려 달라하여 가지고 여기서 서쪽으로 30리 쯤 가시면 설봉산 밀에 토굴을 짓고 공부하는 신승(神僧)이 계시니 그 스님을 찾아가서 물으시면 반드시 좋은 해몽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성계는 즉시 노파가 일러주는 대로 행동하여 설봉산 밑 신승이 있다는 토굴을 찾아갔다.
스님께서는 이미 이성계가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성계가 좀 이야기를 하자, 무학 대사는 옷깃을 여미고 정색을 하며, 다음과 같이 꿈을 풀이하였다.
「그 꿈은 희유한 꿈입니다. 천집의 닭이 일시에 운 것은 고귀위(高貴位)니, 높은 벼슬에 오른다는 뜻이요, 천집의 방아가 일시에 찧어 보인 것은 절거당(析巨握)이니, 큰 깃대가 꺾어진다는 것으로 고려의 왕조가 망한다는 뜻이요, 헌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셋을 지고 나온 것은, 임금 왕(王)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지면 열매가 맺게 되고, 거울이 깨어지면 소리가 나는 법이라,
장차 반드시 왕위에 나아갈 징조입니다.」
하고, 왕사는 이성계를 뚫어지게 자세히 보며, 오늘 일은 조심하여 함부로 말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만일 내가 장차 스님의 말씀과 같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스님을 위하여 큰 절을 지어드리오리다.」
하였다.

무학대사는 이 말이 끝나자, 다시 말하기를,
「한 나라에 임금이 되는 복도 적은 복이 아니오나 큰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보다 큰 복을 지어야 하옵고, 성인의 힘을 입어야 하옵니다.
그렇게 하려면 복 짓는 일을 먼저 행하여야 될 것인 즉, 이곳에다 절 하나를 짓고, 그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하고, 북청(北靑) 광제사(廣濟寺)에 모신 5백 나한(羅漢)님을 하루에 한분씩 업어 모셔다가 오백성재(五百聖齋)를 올려 천일 간을 몰래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큰 희망을 품고, 즉시 이 스님이 지시하는 대로 절을 짓고, 오백성재를 올리고, 남몰래 천일간을 정성껏 기도를 했다.

이때 광제사에 있는 5백나한님을 배로 모셔다가 마지막 날 두 분이 남았으므로 한꺼번에 두 분을 업어 모셔왔더니, 한분은 노여움을 사서, 묘향산(妙香山)으로 가셨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지금도 안변 석왕사 오백나한전에는 한분이 비어서 앉으셨던 자리만 남아 있다.

그 뒤 이성계는 차차 벼슬이 높아지고, 더욱이 무술이 뛰어나서, 해적들을 막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는 또 고려 말에 특별한 실력을 가지고 있던 승군(僧軍)과 손을 잡았고, 보부상(褓負商)과 깊은 관계를 맺어 경제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태조의 등극에 결정적 계기가 된 위화도(威化島)회군 때에도 그의 배후에서 수족처럼 움직이던 사람은 승군 영도자인 신조(神照)라는 천태종(天台宗) 출신의 승려였다.

무학왕사는 설봉산 토굴에서 이런 일이 있은후 다시 옛날 주석하던 고달산 토굴로 옮겨 갔다.
무학왕사가 45세 되던 해 (고려 공민왕20년, 서기 1371년) 겨울에는 고려의 제31대 임금인 공민왕(恭愍王)이 나옹선사를청하여, 금란가사(金蘭袈裟)·내외법복(內外法服)·발우(銶盂)를 하사하고,
「왕사대조계종사 선교 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王師 大曹溪宗師禪敎都緖.攝勤修本智 重興祖風 福國祐世 普濟尊者)」에 봉하였다.
그때 나옹선사는 전라도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였는데, 무학대사에게 글을 보내어 의발(衣鋒)을 전하였으므로 무학대사는 이를 배수(拜受)하고 글로 사례하였다.

무학대사가 50세 되던 해, 고려 제 32대 우왕(偶王)2년 서기 1376년 여름에 나옹왕사는 경기도 양주 회암사(懷巖寺) 주지가 되어 이를 크게 중창하고, 그 낙성식(落成式)에 무학왕사를 불러 수좌(首座)로 삼고자 하였으나 무학왕사는 이를 굳이 사양하였다.
그런데 이때 서울 신도들의 왕래로 길이 에워저 큰 혼란이 생겼으므로, 나옹왕사는 왕명으로 밀성(密城 :密陽) 영원사(榮原寺)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가는 도중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에서 병환이 났다.

무학왕사는 스님의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으나 이미 나옹왕사는 병환이 침중(沈重)하였다. 시탕(侍湯)한 지 10여일 만인 5월 5일에 나옹왕사는 열반에 드셨다.
무학왕사는 스님의 유해를 다비(茶毘 :火葬)에 부친 뒤 사리는 신륵사에 모시고, 비석과 부도(浮屠)는 회암사에 세운 뒤 자취를 감추어서 명산대천과 영구승지(靈區勝地)를 편력하면서 보림행(保林行)을 하였다.

고려 제 34대 공양왕 4년(서기 1932년) 7월에 태조 이성계가 공민왕을 폐출하고, 송도(松都)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의 윤리관은 이성계가 고려의 왕씨 조정에서 벼슬하던 신하로서, 임금을 들어내고, 그 자리를 빼앗은 것은 이신벌군(以臣伐君)이라 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좀처럼 이성계에게 돌아가지 않고, 또 왕씨 조정에서 벼슬하던 신하들도, 문관(文官) 72인은 서두문동(酉杜門洞)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무관(武官) 49인은 동두문동(東杜門洞)에 들어가서 나오지 아니하며, 새로 과거를 보아도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태조의 마음은 극도로 초조하여졌다.
이태조는 천 가지로 생각하고, 만 가지로 헤아려 보아도 좋은 도리는 생각나지 않아 가슴만 바짝바짝 태웠다.
「아 ! 이런 때에 무학대사나 있었으면 어두운 밤에 등불이 되어 줄 수 있을 터인데‥‥‥」
하고 탄식하기 한 두번이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는 마침내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도백(道伯. 觀察使)들에게 전교(博敎 : 임금의 명령)를 내려
「무학대사를 찾아 모셔오라.」
고 하였다.
삼도(三道) 도백들은 어명을 받들고 도내 방방곡곡을 수소문하여 마침내 고달산에 숨어 있는 무학대사를 찾아 모셔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달산에는 삼도 도백들이 도장(印)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무학대사를 찾아 뵈었다고 하여 삼인봉(三印峰)이라는 산봉 이름이 생겨났다.

이태조는 무학대사를 반가이 맞아 즉시 수창궁에서 왕사를 봉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니, 때는 태조 원년(서기 1392년, 壬申)10월 11일. 이태조 탄신일이었다.
이태조는 무학왕사에게 왕사 직첩(直繼)과 함께
「대조계종사·선교 도총섭전블심인변지무애 부종수교 홍리보제 도대선사 묘엄존자(大曹溪宗師 禪敎都總攝 傳佛心印 辯努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
라는 가자(加資 : 正三品通政大夫이 상의품계를 올리던 일)를 내리었다.

그리고 태조는 무학왕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왕사님! 과인이 재주 없고 덕이 부족하여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으니, 이 일은 어떻게 하면 백성이 믿고 따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무학왕사는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이렇게 왕에게 주달(奏達)하였다.
「전하! 예로부터 밝은 정사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어진 임금은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린다 하였으니, 전하께서도 백성에게 어진 덕을 베푸시옵소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어진 덕을 베풀 수 있겠습니까?」
「전하 ! 세 가지 묘한 방안이 있습니다.
첫째, 대사령(大赦令)를 내려서 옥에 갖혀있는 죄수들을 전부 석방하고, 효자·열녀를 표창하는 일이요,
둘째, 나라의 창고를 열어서, 쌓아둔 곡식을 풀어서 굶주린 백성를 진휼(賤恤 ·흉년에 곤궁한 백성을 구원하여 주는일) 하는 일이요,
셋째, 왕도를 옮겨 백성의 인심을 새롭게 하는 일이옵니다.」
태조는 이 말을 들으시고 무한히 기뻐하면서, 왕사의 상주한 말씀대로 실행하기를 결심하고, 즉시 어명을 내려 한 가지 한 가지씩 실천에 옮겨 갔다.

이때 고려 말기 삼은(三隱)의 한분인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선생은 무학왕사에게,
「성주룡비천 왕사불출세(聖主龍飛天 王師佛出世)」
란 글을 지어 보내어 치하하였다.
이 해에 무학왕사의 세수는 66세였다.

이듬해 태조 2년에는, 새로운 왕도를 선택하라는 어명을 받들고, 새 왕도자리를 물색하기 위하여 각처로 자리를 답사하기 시작하였다.
무학왕사는 마침내 한양과, 계룡산 신도(新都), 두 곳을 후보지로 선택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계룡산 신도안에 가서 수만명의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궁궐터를 닦고, 새 왕도 건설에 분망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깊은 밤에 주산(主山)인 연천봉(達天峰)에 이상하게 몸차림을 한 노인이 나타나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 신도안은 뒷날 정씨의 도읍할 땅이요, 이씨의 도읍터는 한양이니, 지체말고 한양에 가서 왕도를 정하여라!」
이 말을 듣고 성를 쌓던 백성들은 물론. 지방에 사는 백성들까지 마음이 설레이기 시작하였다.
이때 태조는 즉시 명을 내려 신도안의 공사를 중지하고, 한양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9월에는 한양에「신도 궁절 조성도감(新都 宮厥 造成都監)」을 두고 본격적인 역사를 시작하였다.
계룡산 신도안의 공사를 갑자기 중지하고, 한양으로 와서 도읍을 정한 일은 계룡산 연천봉 산신님이 밤중에 나타나서 외친 것을 계기로 취한 일이니, 이 소문은 한입두입 백성들의 입을 통하여 전국 각지에 퍼지게 되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은,
「이씨(李氏)가 왕씨 (王氏) 종성을 빼앗은 것은 역시 천의 (天意)일세」
하고, 백성들의 마음이「이씨조선」으로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물론 무학왕사가 백성들의 마음을 이씨왕조로 돌아오게 만든 술책이었다.
연천봉에 나타났던 산신도 신이 아니라 비밀속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학왕사가 한양에 와서 터를 잡으려고 하는데, 먼저 왕십리에서 땅을 파다가 도선 국사가 비석을 만들어 놓은 것을 발견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 때의 무학왕사의 세수는 88세의 고령이었다.

무학왕사는 종묘사직 궁궐터를 정하는데 인왕산(仁旺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백악(白岳)을 청룡(靑龍), 남산(南山)을 백호(白虎)로 삼아, 동향(東向) 대궐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정도전(鄭道傳)이 반대하였다.
「예로부터 제왕은 남면이치(南面而治)하였고, 동향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노라.」
무학왕사는,

「만일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백년 후에 국가에 큰 환란이 있을 것이니 그 때에 가서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오.」
하였다.
정도전이 기어이 고집을 세워서 이 말을 믿지 아니하고, 백악을 진산으로 하고, 인왕산은 백호로, 낙산(駱山)을 청룡으로 하여 남향 대궐을 지었으니, 과연 2백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대궐은 불타버리고, 삼천리강산은 피로 얼룩졌다.

또 전설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성을 쌓을 때, 지금의 영천「무학재고개」에서 성을 밖으로 내느냐 안으로 들이느냐에 대하여 오랫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한다.
만약에 왕사의 말대로 성을 밖으로 내어쌓으면 불교가 크게 성할 것이요, 유신들의 말대로 들여쌓으면 유교가 크게 성한다는 것이었다.
불교의 무학왕사와 유교의 일파가 서로판가름한 곳이라 하여「무학재고개」라 부른다는 것이다.
이때 무학왕사의 의견은 마침내 성을 안으로 들이자는 정도전 일파의 의견에 눌리고야 말았다 한다.

이보다 앞서 태조 2년 봄에, 무학왕사는 계룡산을 다녀와서 3월말 경에 송도로 초청을 받았다.
때마침 태조가 개성 연복동의 연복사(演福寺)에 오층탑(五層塔)을 세우고, 건국을 경축하는 뜻으로, 문수법회(文殊法會)를 여는 기회에 왕사를 청하여 설법을 하게 한 것이다.

그해 봄에 회암사 일대에 악질 유행병이 돌아다녀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리하여 무학왕사는 회암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연복사와 광명사(廣明寺)등에 있게 되었다.
그가 자주 궁중으로 초청을 받고, 많은 물건을 받은 것도 모두 이 때의 일이다.

태조와 왕사의 친분을 기록한「석왕사기(釋王寺記)」를 보면, 어느 봄날 두 분은 수창궁에서 농담을 하면서 희롱삼매(離弄三味)에 들었을 때, 태조가 먼저 말하였다.
「누가 농담을 잘 하는가 내기를 해 봅시다.」
「대왕께서 먼저 하십시오.」
그래서 태조가 먼저 농을 걸었다.
「내가 보니 스님은 돼지처럼 생겼소.」
「제가 보니 대왕께선 부처님 같습니다.」
왕사의 대답이 의아스러운 듯이 태조가 물었다.
「어째서 같이 농을 하지 않으시오?」
왕사는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돼지의 눈으로 보면 모두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 눈으로 보면 모두 부처님으로만 보이는 법입니다.」
두 분은 손뼉을 치고 껄껄 웃었다 한다.
이와 같이 태조와 왕사는 허물없는 사이였기 때문에 이조의 건국 사업에는 무학왕사의 공이 적지 않게 반영되었던 것이다.

그런 뜻에서 태조 3년 3월에 태조는 무학왕사의 출생지인 삼기현(三岐縣)을 군으로 승격시키고, 왕사의 아버지에게는 문하시랑(門下侍郎)의 벼슬을 추증(追贈)하였다.
그 뒤 왕사는 다시 회암사로 가서 수도하게 되었다.
태조는 기회 있는 대로 친히 가기도 하고사람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보다 앞서 태조 2년 9월에는 무학왕사께서 선사(先師) 지공(指空)·나옹(懶翁) 두 선사(禪師)를 위하여 탑명(塔銘)과 진영(眞影)을 모실 것을 주청하였던 바, 이 태조는 어명을 내려 이를 윤허하여, 탑은 양주 최암사에 모시고, 진영은 개성 만월동의 광명사에 모시고, 몸소 다음과 같은 영찬을 지으셨다.

지공천정평산할 (指空千劒平山喝)
선택공부대어전 (選擇工夫對御前)
최후신광유사리 (最後神光遺舍利)
삼한조실만년전 (三韓祖室萬年傳)

그해 10월에서는 개성 연복동의 연복사에서 전장불사(轉藏佛事 :대장경을 轉讀하는 불사)가 열렸을 때, 어명으로 무학왕사를 주석(主席)으로 모셨다.
무학왕사는 여기에서 5년동안 전장불사에 진력하시다가 태조 7년(서기 1938년,戊寅)에 사퇴하고, 양주 회암사, 도봉산 회룡사, 삼각산 청룡사, 양주 묘석사 등 여러곳에 주석하였다.

태조는 왕위를 물러난 뒤로 태종을 매우 미워하고, 서울을 떠나 함흥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문안을 드렸으나 그 정이 미치지 못하고, 노여움만 더하게 되었다. 태종은 생각다 못하여 무학왕사를 청하여 태조를 환궁케 하도록 꾀하였다.
「왕사께서 함흥 본궁에 내려가서 상왕의 마음을 돌이켜서 서울로 회란(回鎣 :還官)하시도록 권하여 보십시오. 그동안 수십명의 칙사를 보냈으나, 한사람도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이 없이 모두 죽었으니,
왕사께서 가셔야 부왕의 노여움을 풀으시고, 회란하시게 할 수 있을 것이오니,
수고를 아끼지 마시고 함흥에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무학왕사는 태종의 간곡한 이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대궐을 물러나와 즉시 함흥길을 떠났다.
이태조는 무학왕사를 반가이 맞아 환담하다가, 별안간 노기에 찬 음성으로,
「왕사께서는 태종의 명을 받고 나를 달래러 온 것이 아니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왕사는 태연자약한 얼굴빛으로,
「전하! 그게 무슨 황공한 처분이시오니까? 빈도 오랫동안 전하의 용안을 뵈옵지 못하와 문후(門候)차로 들린 것이옵고, 어찌 왕명을 받들고 차사로 왔을리야 있사오리까?」
하니 태조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의 노기를 거두시고, 격조(隔阻)한 회포(讀抱)를 서로 이야기하게 되었다.

무학왕사는 대왕을 모시고, 수십일 동안한 방에서 기거숙식을 하면서 한 번도 태조의 잘못을 말하지 않고 지내다가, 어느 날밤 삼경(三更)이 지났을 때에 왕사께서는 조용히 일어나서 태조왕에게 이런 말씀을 주달하였다.
「전하 ! 태종에게는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정은 천륜(天倫)이옵니다.
태종의 잘못을 용서 하옵시고, 부자분이 서로 만나셔야 됩니다.
아무리 자식의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어버이로서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자의 천륜인 것입니다. 또한 만약에 이 사람을 버리시면 전하께서 창업하신 이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위탁하시렵니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도 없는 일이요, 결국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계승승(繼繼承承)하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태종은 전하께서 화가위국(化家爲國)하실 때에 수훈의 공(殊勳之功)을 세우시고, 전하의 성하의 성업 (聖業)을 익찬(翼贊)하셨으니 여간 잘못이 있더라도 하해(河海)같으신 성은(聖恩)으로 용서하시지 않으시면 어이 하시겠습니까? 속히 회란하시와 만백성의 비원(悲願)을 살피시옵소서.」

무학왕사의 이와같은 간곡한 주달을 듣고 계시던 태조께서는 침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왕사! 내 수이 서울로 가겠소이다, 왕사 ! 먼저 가시면 내 곧 올라가겠습니다.」
이리하여 무학왕사는 즉시 한양으로 돌아가서 태종에게 봉명하고, 궐하(闕下)를 물러나와 의정부 도봉산 아래 회룡사(回龍寺)에 나와서 용가(龍駕)를 기다리다가 어가(御駕)를 모시고 입경하였다.
그 후 왕사는 한양의 흥인문 밖 청룡사에 잠시 주석하였다.

이때 청룡사는 연구세심(年久歲潗)하여 몹시 퇴락하였다.
왕사께서는 청룡사를 중창할 것을 태종에게 주청하였던 바, 태종께서는 왕사의 공로를 고맙게 여겨서 즉시 어명을 내려 청룡사를 중창하게 하였다.
태종 3년에 역사를 시작하여 2년후인, 태종 5년(서기 1405년) 5월에 낙성하였으며, 중창한 총 간수는 3백여 간이나 되었고, 그 건물 규모도 실로 웅장하였다.
청룡사의 낙성이 끝나자, 그해 6월에 왕. 사께서는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잠시 진불암(眞佛庵)에 계시다가 9월에 금장암(金藏庵)으로 옮겨갔다.

어느날 왕사께서는 대중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를,
「내 오늘 가겠노라!」
「사대(四大)가 각각 흘어지면 스님은 어느 곳을 향하여 가시겠습니까?」
왕사께서는,
「모르겠노라.」
대답하였다.
수좌가 다시 물으니 왕사께서는 거듭 소리를 가다듬어,
「모르겠노라.」
수자가 다시 물었다.
「스님께서는 병중에 병들지 않은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왕사께서는 손가락으로 옆에 앉은 어떤 수좌를 가르쳤다. 수좌가 또 물었다.
「색신(色身)은 지·수·화·풍[地(骨) -水(血) ·火(熱) ·風(呼吸)]사대로 이루어진 것이라 필경 흩어지겠거니 어떤 것이 참 법신(法身) 입니까?」
왕사께서는 두 어깨를 치켜세우며,
「이것이니라.」
하시고 적연(寂然)히 열반하셨다.

때는 태종 5년(불기 1949년, 서기 1405년, 乙酉) 9월 11일 야반(夜半)이었다.
이때 왕사의 세수는 79세며, 법람(法臘)은 61세였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태종 7년(서기1470년, 7酉) 12월에는 왕사의 정골(頂骨)을 받들어, 양주 회암사에 석탑을 조성하여 모셨고, 또다시 4년이 지난 태종 10년 7월에는 태종께서 변계량(卞季良)을 시켜서 왕사의 비명 (碑銘)을 지어 비석에 새겨서 세우게 하고, 또 태종은 왕사에게 시호(諡號)를 내렸다.

<李朝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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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3/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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