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와 불교의 왕국 캄보디아

힌두교와 불교의 왕국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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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호국
• 국가 : 기타
• 참고문헌 : 동남아불교

캄보디아는 인도차이나반도 중앙부에 위치한 나라로 한때「크메르」라고도 불리웠으며, 인구는 800만 명이다.
전설에 의하면 고대 캄보디아는 인도에서 건너온 왕이 이 나라의 여왕과 결혼하여 개국했다고 한다.
이 전설에서 보듯이 캄보디아의 문화와 종교는 인도로부터 전래되었음이 확실하다.
이 나라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종교는 힌두교와 불교로서 민중의 생활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캄보디아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혼재하여 있기 때문에 불교에는 미신적, 토속적 요소가 많다.
지금도 남아있는 앙코르와트의 유적은 불교가 캄보디아에서 힌두교와 어떻게 혼융되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11세기 이후 확립된 상좌부 불교의 전통은 캄보디아를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중요한 불교국으로 발전시켰다.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은 누구나 한 번를 출가생활을 하는 것이 전통으로 되어 있으며, 사원에서의 교육은 그들이 평생 동안 살아가는 삶의 표준적 가치를 제공해 주고 있다.
승단의 조직은 태국과 마찬가지로 마하니카야와 담아유타니카야 양파로 나누어져 있다.
승려의 수는 1970년 통계에 따르면 마하니카야가 5만 3천 200명, 담마유타카야가 1천 300명 등 5만 4500명이었다.
사찰수는 마하니카야가 2천 980개, 담마유타니카야가 110개로 캄보디야가 110개로캄보디아 전체로는 3천90개다.
그러나1946년에 비하면 승려의 수는 약간 줄어든 반면 사찰은 계속 늘어났다.
1946년 캄보디아 불교는 2천 696개의 사원에 6만 5천48명의 승려가 있었다.
이 나라의 승단은 상가나요크라 불리우는首長에 의해 통솔되는데, 서로 독립되어 각자의 교단에 대해서만 책임을 진다.
캄보디아 불교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사회 교육적 기능이다.
대개의 교육기관은 사찰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따라서 국민전체를 대상으로 자연스러운 종교 교육을 하게된다.
1970년 통계에 따르면 캄보디아 불교사원에서 운영한 초등파리어 학교는 529개, 학생수는 1만 983명, 불교고등학교는 2개로 학생수는 500명, 불교대학은 1개로 112명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활동은 1975년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폴포트에 의해 수십만이 학살된 캄보디아는 종교도 완전히 없애 버렸다.
폴포트를 내몰고 헴 삼린 정권이 들어서면서 몇 군데의 사원이 복구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승려가 되는 것은 막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은「과학적 유물론은 미신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며 폴포트의 학살 만행을 피해 용케도 살아남은 스님들이 더 이상 불교교리를 전파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최근 한 서방기자의 르포에 따르면,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여러 가지 그림이나 조각을 팔던 상점들에는 옛날의 풍경이 사라진지 오래이고 안드로포프나 헴랜의 초상화를 팔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캄보디아 불교의 현재적 상황이 어떠한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민중의 삶에는 불교적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었을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이 나라의 불교가 수 천년에 걸쳐 민중들의 생활과 깊은 관계를 맺어오면서 그들과 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전 3세기경에 아쇼카왕이 파견한 전도승에 의해서라고 알려지고 있다.
이것은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해진 것과 때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캄보디아의 역사는 1세기말 메콩강 하류에서 부남(扶南)이란 나라가 세워진 것에서부터 시작되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캄보디아 불교사의 단초로는 볼 수 없다.
캄보디아 불교사의 첫 장은 3세기초 열렬한 불교신도였던 범만왕(范蔓王)시대 때부터 비롯된다.
그는 불사를 짓고 승려를 존중했으며, 불교를 보호하는 정책을 했다.
이어 5세기 초, 카운디야왕조가 들어서면서 캄보디아의 불교는 크게 융성하여 승가바라(460-524)와 같은 유명한 고승을 배출했다.
그는 512년 아육왕경(阿育王經)등 많은 불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가 양무도(梁武燾)의 명을 받아 역경에 종사했다.
이에 앞서 관야발마왕(關耶跋摩王) 때에는 자가선(雌伽仙) 비구가 재남(齋南)의 무제에게 파견돼 불상을 헌납하고(484년) 돌아오기도 했다.
부남시대(扶南時代)의 섬성(纖盛)했던 불교의 상황은 중국의 구법고승 의정삼장(義淨三藏)(653~713)이 쓴 동남아여행기(南海寄歸內法傳)에도 소상한 기록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부남시대의 캄보디아에는 정양부(正量部)와 유부(有部)의 불교가 유행했었다고 한다.
동남아의 중심 국가로 6세기까지 흥성했던 부남은 속국이었던 진뇌(眞腦)의 샤나바르만왕에 의해 멸망했다.
샤나바르만시대의 특기할 만한 사실은 대승불교가 이입(移入)됐다는 사실이다.
최근 발견된 자료는 이 시대에 관세음보살상 건립에 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진랍은 한때 융성했으나, 왕위계승 문제가 원인이 되어 남북으로 분열됐다.
이를 수진랍(南) 육진랍(北)이라 하는데, 9세기초 자야바르만 2세가 재통일을 하고 앙코르왕조를 열었다. 앙코르왕조의 3대왕인 야쇼바루만 1세는 수도를 앙코르 톰으로 옮기고 대승불교를 공식으로 승인했다.
그는 특히 세계적 걸작품으로 알려진 앙크로와트(T城寺)를 조영한 왕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캄보디아 특유의 힌두교와 불교가 혼재하고 있다.
이어 1002년에 즉위한 스리아바루만 1세는 스스로 불교도입을 선언하고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하지만 앙코르왕조는 힌두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를 탄압하지 않았으며 소승과 대승도 엄밀하게 따지지 않았다.
1181년에는 캄보디아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자야바루만 7세가 즉위하여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
그는 열렬한 불교신도로서 특히 관음신앙이 대단히 깊어 여러 곳의 거대한 암석에 관세음보살상을 조각했다.
「앙코르의 미소」 또는 「크메르의 미소」라 불리우는 이 조각은 눈을 반쯤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신비한 미소를 띠고 있어서, 크메르불교 미술의 대표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앙코르왕조는 자야바루만 7세 시대를 절정으로 점차 쇠퇴하여, 13-15세기에는 태국의 침공을 받아 수도를 프놈펜으로 옮겼으나 서서히 멸망하고 말았다.
캄보디아의 근대사는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배로 시작된다.
프랑스는 불교의 전교(傳敎)를 억압했으나, 앙코르의 유적군(遺跡群)은 그들에 의해 발굴되고 보호됐다.
오늘날 세계에 자랑하는 앙코르의 유적은1989년 월남한 하노이에 세워졌던 「프랑스극동학원」의 조직적 연구에 의한 것이 많다.
외국의 지배아래 있으면서도 캄보디아국민의 불교에 대한 신앙은 열렬했다. 황의를 입은 승려들은 승복을 입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존경을 받았으며, 외국인들은 캄보디아를 <승려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였다.
불기 2494년(1950년)에는 인도에서 사리불(舍利弗)과 목건련(目建連)의 유골을 봉안해 와 대대적인 법회를 가졌다. 16세기 이후 전통적으로 왕실의 보호를 받아온 라오스 불교는 1947년 헌법개정때 국교로 정해졌다.
또 1951년에는 태국의 선례를 쫓아 <라오스 상가법>을 제정했다.
1957년에는 불멸 2500년 기념식도 성대히 가졌다.
라오스의 헌법 전문(前文)에는
「‥‥라오스인민은이 헌법에 의해 다음의 의무를 진다. 조국에 대한 신봉, 종교의 존중‥‥」
그리고, 본문7조에는「불교를 국교로 한다. 왕은 그 최고의 보호자가 된다」.
제 8조는「왕은 열렬한 불교신도가 아니면 안 된다」고 명시했었다.
라오스의 불교사원 가운데 유명한 절들을 수도 브양트얀에 있는 방룡사(尨龍寺)·중앙사원(中央寺院)·타트루앙사·와트프라크사 등을 꼽을 수 있다.
방룡사는 수도 브양트얀에 있는 유일한 베트남계 사원으로 규모가 크고 잘 정비되어 있다.
이 절에는 베트남인과 중국계 회교불교신도들이 나오고 있다.
법당에서 본존으로 석가모니불을 모셨고,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좌우보처로 봉안했다.
중국계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 아침에는 능엄주, 저녁에는 아미타경을 봉독하는 모습이 남방 불교권에서는 특이 하다 중앙사원은 마하니카야파에 속한 두 번째 큰절로 500여년 전에 창건한 고찰이다.
장려하고 아름다운 건물은 라오스의 불교사원을 대표한다.
경내에는 팔리어학교도 부설돼 있으며, 비구와 사미 200여명이 4학급으로 나눠 공부를 한다.
이 학교에서는 매년 3월 졸업시험을 치르는데 이 시험에 합격해 졸업한 비구는 높은 대우를 받는다.
또 이 절에서는 일반 청소년들을 위해 야간학교와 일요학교도 경내에 운영하여 사회교육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광대한 부지에 금색과 흑색의 첨탑이 높게 솟아 있으며 그 밑에는 높은 기단의 회랑이 주위에 둘러져 있다.
이 절의 탑은「황금의 탑」 또는「국왕의 탑」이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탑 속에는 거대한 에메랄드불상이 안치돼 있었다.
이 불상은 타이가 약탈해가 봉안하고 있다.
라오스에서 승려들의 평상생활은 새벽 4시에 기상하여 5시까지 좌선을 하고 6시에 탁발을 나간다.
오후는 각자의 시간을 가지며 취침 전에도 1시간씩 좌선을 한다.
좌선은 반가부좌로 1시간씩 하고 5분은 휴식을 취하는데 좌선법은 수상관(水想觀), 광상관(光想觀) 등의 관법으로 한다. 불전의식(佛前儀式)은 새벽 4시, 오전6시, 오후 6시 등 하루에 3회를 한다.
한때 재가 불교운동도 일어났던 라오스에서는 국내의 불안한 정정을 반영하여 불교와 사회주의를 접목하려는 움직임도 승려들 사이에 있었다.

<동남아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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