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불교

미얀마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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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 호국
• 국가 : 기타
• 참고문헌 : 동남아불교

미얀마들은 그들의 나라를「황금의 미얀마」라고 부른다.
도금된 사원의 지붕은 추수시의 들판과 잘 조화를 이루어 나라 전체를 황금색으로 만든다.
노란색 법의를 입은 스님들은 온통 황금색으로 물든 거리를 발우를 들고 눈을 지그시 내려감은 채 걷는다.
그 모습은 이 나라가 오랫동안 불교적 전통으로 살아왔음을 실감케 한다.
인구 2천 800만의 버마는. 2차대전시 한때 미얀마 남자의 10% 가량인 80만명이 비구와 사미승이었다.
오늘날 승려와 사미승의 수는 8만에서 12만명 가량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전체인구의 85%가 불교도로 알려 지고 있다.
마얀마에서는 불교는 전통적으로 국교의 위치를 누려왔다.
1855년 티바우왕이 영국의 침략자에 의해 인도의 서부해안으로 개방될 때까지, 국가는 불교적 이념으로 정치를 했다.
마얀마의 역대 왕들은 그들이 신성을 불교적 근원에서 찾았다.
군주들은 언제나 불교의 보호자요, 후원자들이었다.
현재에도 남아있는 세다곤탑이나, 만달레이탑은 이들 왕들의 후원으로 건립된 것이다.
랭군 시내에 있는 세다곤탑은 높이 120m, 둘레 450m나 되는 대탑이다.
이 탑에는 500개 이상의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고, 탑은 황금으로 도금되어 있으며, 바닥은 대리석으로 되어있다.
랭군 북쪽의 만달레이시에도 450개의 탑이 있다.
큰 황금탑을 중심으로 450개의 하얀색 불탑이 세워져 있다.
둘레에는 민돈오아의 후원으로 제5차 결집을 하고, 대리석 판에 파리어로 불경을 새겨 비석처럼 세워 놓았다.
미얀마의 승단은 3개의 종파로 구성돼 있다. 3개 종파는 각각 최고지도자인 장로에 의해 통솔되고 있다.
모든 국민들의 일상생활은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국민들은 스님에게 예배하고, 그들의 수입의 일부를 보시하는 것을 상식으로 안다.
국민들의 교육도 대부분 사원에서 담당하고 있다.
8~9세의 어린이는 지방사찰이 운영하는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도록 되어 있다.
미얀마에 불교사가 개교된 것은 11세기 경파간왕조를 세원 아나라타왕(1044-1017)때이다.
인도의 동부 앗삼 지방과 접경한 미얀마는 기원을 전후해서 인도문화의 영향권에 들게되 11세기 이전에 이미 인도의 많은 종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것은 민간신앙적 차원을 넘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가들은 미얀마에 불교가 공식으로 개교되기 이전에 이미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밀교, 그리고 힌두교가 버마에 들어왔었던 흔적을 발견해 내고 있다.
그러나 정작 미얀마에 불교의 뿌리를 굳건히 내리게 한 것은 인도가 아닌 스리랑카였다.
아나라타왕은 남부버마의 몬족을 정복하고 파간에 수도를 정했으며, 스리랑카에서 팔리성전과 상좌부 불교를 전승해온 몬족출신의 비구 싱 아라한에게 불교를 사사 받았다.
이후 아나라타왕은 부파계 불교와 대승불교, 밀교, 힌두교 등 갖가지 종교가 혼합돼 있던 버마지역에 상좌부계 불교를 확립하여 오늘날의 버마불교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미얀마에 불교를 전해 준 스리랑카는 9세기 중엽부터 남인도 치요라 왕조의 침입을 받아 정사 (精舍)와 불탑이 파괴되는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득도식(得度式)을 비롯한 승단의 의식을 행하는데 필요한 수의 비구가 모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무렵 즉위한 스리랑카의 비자야 바후 1세(1055~1100)는 미얀마에 사신을 파견해 스리랑카불교의 부흥을 요청했다.
아나라타왕은 비자야 바후의 요청에 따라 장로를 파견하는 외에 많은 경전을 함께 보내 주었다.
미얀마불교는 스리랑카가 16세기경 포르투갈의 침공을 받아 불교가 멸망 직전의 위치에 놓였을 때에도 자국의 장로들을 파견해상좌부 불교의 법통을 계승케 해준 일이 있다.
미얀마는 13세기경 스리랑카로부터 다시 상좌부 불교의 법통을 이어온 일이 있다.
파간왕조의 멸망과 더불어 상좌부 불교가 함께 쇠퇴하게 되자, 뒤이어 일어난 페구왕조의 담마제디왕(1406~1491)은 1476년 비구와 사미 22명을 스리랑카에 파견하여 콜롬보 교외의 칼라니 (지금의 켈레니아)에서정식으로 수계를 받게 했다.
이때 담마제디왕은 칼라니에 비문을 남겨 당시의 교상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미얀마불교는 개교 이후 인근의 다른 불교국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순탄하게 발전해 왔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왕가의 절대적인 지지와 보호에 힘입은 것이었다.
미얀마불교가 정치권력에 의해 최초로 시련을 겪은 것은 1826년부터 1848년까지 22년간 영국의 식민통치 기간이었다.
영국의 식민지배자들은 구두를 신은 채 불교도가 신성시하는 만달레이사원 안에 들어가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으며, 그들의 종교인 기독교를 심기 위해 온갖 술책을 다 사용했다.
젊은퐁기(Pongi : 버마에서 스님을 지칭하는 말)들은 민족주의자가 되였다.
청년불교도협회가 1908년에 창설되었고, 일만불교도협회가 1911년 조직되어 反英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1년 조세(粗稅) 지불거절과 불매동맹을 촉구했던 반영운동의 지도적 승려 우 오타마는 식민통치당국에 체포되어 1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다른 승려들도 1930-1931년까지 민족주의자 사야산에 의해 지도된 영국지배에 저항하는 폭동에 참가했고. 다시 1938년 무력투쟁에 뛰어들었다.
미얀마의 독립운동에 불교가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단일 민족이 아닌 미얀마의 다양한 인종집단(미얀마족·샨족·몬족·아라칸족)을 한데 통합해 준 것이 불교였으며, 문맹자계층에서 엘리트에 이르는 다양한 집단을 연결시킨 것도 불교였다.
식민지배하에서 그들은 종족과 이해관계는 달라도 불교라는 공통점에 뭉쳐 서구 식민세력에 대항했다. (미얀마인이 되려면 불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미얀마가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정부를 세우면서 우누가 수상에 취임했다.
아웅산의 뒤를 이어 미얀마 민족주의의 지도자로 추대된 우누는 열렬한 불교신자였다.
그의 영도하에 1945년과 1951년에 승가의 내부조직 강화를 위한 사찰법을 제정하였으며, 630만 달러를 투입해서 신설도서관을 포함한 불교대학과 랭군교외에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동굴과 세계평화사원을 축조했다.
우누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미얀마불교는 국제 불교활동의 주도권을 갖고, 태국·스리랑카와 함께 W.F.B를 창설하고, 1954년12월 제3차 세계불교도대회(랭군대회)를 지원했다.
특히 1961년에는 그의 노력에 의해 불교가 헌법상 국교로 공식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소수 종교의 반발 미얀마사회가 혼미에 빠지자 1962년 3월 2일 같은 불교도인 네윈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네 윈은 사회주의자로 버마의 사회주의화를 위해 불법사회주의 (Socialism D-harmigue)라는 독특한 이념을 정립시켰다.
그는 정치와 불교를 분리시키기 위해 1964년4월 반정부적 승려 92명을 체포하기도 했었다.

<동남아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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