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삼가

박삼가

분류 문학 > 현실적인물형 > 현자(賢者)형

• 갈래 : 전설
• 시대 : 조선
• 신분 : 관료
• 지역 : 기타
• 출처 : 김기설 (219)
• 내용 :
옛날 강릉에 박삼가 선생이 살고 있었다. 이때는 연산군 때로 법으로 삼년상을 금지하고 법을 어긴 자는 사형에 처했는데 박삼가 선생은 삼년상을 치렀으나 아무도 이르는 사람이 없어 죽지는 않았다. 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물러나자 중종이 효자정문을 내렸다. 병자년에 서울 김추암이라고 하는 교지감이 있었는데 그는 어진 사람이 임금 곁에 많이 있어야 나라가 잘 된다고 생각했었다. 어느 날 금강산 구경 후에 강릉을 지나던 중 박삼가와 박사휴 두 숙질을 만나 인재가 숨어있는 것을 알고 서울로 올라가 임금에게 추천을 했다. 임금은 박삼가 선생을 불러올려 지금도 요순시대의 정치를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선생은 “예전에 쓰던 풀은 지금도 쓰고 예전에 달던 풀은 지금도 달다 하니 사람이 천성이 예전에는 착했는데 지금도 착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고지고자(古之苦者)는 금역고(今亦古)라. 고지감자(古之甘者)는 금역감(今亦甘)이라.]”고 하며 지금도 요순정치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임금은 박삼가 선생이 인재임을 알고, 경상북도 용궁현의 현감으로 보냈다. 용궁현에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재산싸움이 심한 곳이었다. 게다가 두 형제 다 돈이 많아 돈으로 권력을 휘둘러, 고을원도 꼼짝 못해 송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몇 해째 원이 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그곳에 박삼가 선생이 부임한 것이다. 박삼가 선생이 현에 도착 하니 ‘신현맞이’라고 해서 하인들이 가마를 가지고 모시러 왔다. 그곳이 저 대관령 넘어 ‘높은다리’라는 곳인데 처음 원님을 모셔온 다리라고 해서 ‘높은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선생이 고을에 들어와서 정치할 방법을 생각해 보다가 하루는 군민대회를 열었다. 박삼가 선생은 지방의 유지들을 모두 불러 모아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술잔을 기울이며 오늘 이 모임은 이별하는 전별회라고 하였다. 새로 온 원님이 오자마자 전별회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그 이유를 궁금해 하였다. 선생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두 형제가 재산을 가지고 싸우는 고을의 원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당연히 두 형제도 그 곳에 참석을 했는데 덧붙여서 “천하에 얻기 쉬운 것은 재산이고, 얻기 어려운 것은 형제이다. 그 얻기 쉬운 것을 가지고 싸워 형제의 정을 끊으니 그게 할 노릇이냐.”고 말했다. 이 말에 온 마을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고, 두 형제도 마음이 바뀌어 화해를 했다. 그 후로 선생은 그 마을에 원님을 하며 그동안 쌓여있던 송사를 해결하였다. 이 소문이 퍼져 일곱 명의 고을 사람들이 선생에게 송사를 하러 왔다.

선생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송사를 하자면 담배라도 한 무덤 가져와야 하는데 그러면 부담이 될 까봐 사람들에게 그냥 오라고 했다. 사람들은 빈손으로 오기 죄송스러워 하고 있었는데 선생은 그렇다면 새털 하나씩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 후로 송사를 할 때 새털 하나씩을 받았는데 얼마나 송사가 잘되고, 빨리 처리 되었는지 새털을 모아 자리를 매듯하여 가마의 우장을 맸을 정도였다고 한다. 나중에 기묘사화가 나서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오는 중간에 강릉 부사로 왔던 한급이가 인사를 왔는데 그 우장을 보고 부러워했더니 선생은 우장을 줘 버리고 왔다. 박삼가 선생은 이렇게 청렴한 분이라 지금도 강릉의 서원에 배향을 받고 있다.

연관목차

962/1461
현자형
박삼가 지금 읽는 중
용맹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