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운과 수운의 중심지 영산포는 일제 강점기 제국 일본의 도시로 변했다.

조선시대 조운과 수운의 중심지 영산포는 일제 강점기 제국 일본의 도시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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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반에 영산포의 새 주인은 일본인들이었다. 오일장을 중심으로 일본인 상가거리가 들어서고 일본식 명칭인 은좌(銀座) 거리도 생겨난다. 1906년에는 오늘날의 영산포 여자중학교 자리에 일본인 소학교가 들어서고, 전남 내륙에서는 최초로 영산포 일본인회도 창설된다. 1907년에는 영산포 헌병분대, 1908년에는 광주 농공(農工) 은행 영산포 지점, 1910년에는 일본인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寺) 포교소와 일련종사(日蓮宗寺) 등이 들어선다. 한일병합 이후, 1914년에 영산목교(榮山木橋)가 건설되고 1915년에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영산포역이 생겨난다.
일본 거류민의 증가로 인해 영산포는 온갖 상품을 파는 상가들이 즐비하고 ‘게다’ 신은 일본인들이 거리를 오갔다고 한다.

공간

영산포

고려시대 수운의 발달로 형성된 영산포는 1897년 목포항 개항과 함께 전라남도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1910년 일제는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개폐식 목교를 설치하고 1930년대에는 철근콘크리트 다리를 설치했다. 영산포역과 직선으로 연결된 다리는 나주평야의 쌀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탈해가는 수단이 됐다. 1970년대 영산강 하구언이 지어지고 배가 더 이상 드나들지 않게 되자 영산포는 포구로서의 역할을 잃었다. 현재는 내륙하천에 남아있는 유일한 등대인 영산포 등대가 과거의 모습을 짐작케 해준다.

인물

영산포 일본 거류민

영산포 일본 거류민 : 일제 강점기 일본에서 영산포로 이주해 온 일본인을 총칭함. 일제는 일본 거류민을 위해 거리를 정비하고, 학교와 헌병분대, 은행, 신사, 철도 등을 건설했다.

소품

영산포 역

영산포역(榮山浦驛): 1915년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생긴 역. 호남선 직선화로 인해 나주역과 통합되어 폐역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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