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

이자겸

[ 李資謙 ]

시대 고려
출생 - 사망 미상 ~ 1126년(인종 4년)
본관 경원(慶源, 인주(仁州): 지금의 인천)
직업 권세가

고려 인종 때의 외척·권세가. 본관은 경원(慶源, 인주(仁州): 지금의 인천).

경원이씨는 나말여초 인주지방의 세력으로서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문벌으로 성장했으며, 이자겸의 할아버지인 자연(子淵)때는 귀족가문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이러한 가문을 배경으로 그는 음서로 진출했으며, 둘째딸이 예종의 비로 들어간 후 더욱 빠른 속도로 출세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예종이 죽은 후 외손자인 인종을 즉위시켜 권력을 쥐자, 모역사건을 조작해 반대파인 대방공 보(俌)·(韓安仁)·문공인(文公仁) 등 50여 명을 살해 또는 유배시켜 자리를 굳히고는 공신으로 (食邑) 8천호·식실봉(食實封) 2천 호를 책봉받아 숭덕부(崇德府)를 열었다. 한편 자제와 친족들을 요직에 앉히고 아들인 중 의장(義莊)을 수좌(首座)로 삼는 등 불교세력과도 유대를 공고히 하면서 셋째딸과 넷째딸을 인종비로 들여보내 자신의 체제를 다졌다. 이후 남의 토지와 재물을 강탈해 부를 축적하고 이것으로 사원을 포섭, 나 사병을 증가시켜 더욱 세력을 확장했다.

1126년에는 이러한 이자겸의 세력강화에 반발한 김찬(金粲)·안보린(安甫鱗)·지녹연(智祿延) 등 하급관료와 무관들이 이자겸 세력을 타도하려 획책하자, (拓俊京)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후 「십팔자(十八子)의 참설」을 믿고 왕위를 넘보아 두 차례나 인종의 독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종의 밀명을 받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이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갈라놓는데 성공함으로써 척준경이 왕의 밀지를 받들고 거사, 이자겸과 그의 처자는 유배되고 그의 소생 왕비도 폐비되었다. 이자겸은 그해 12월 유배지인 영광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