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미·효심의 봉기

김사미·효심의 봉기

[ 金沙彌孝心-蜂起 ]

시대명 고려
연도 1193년(명종 23년)

1193년(명종 23) 경상도 일대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주도해서 일어난 농민봉기이다. 무신정권기에는 전 기간에 걸쳐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일어났는데, 특히 정권 초기 약 30여 년간에 걸쳐 삼남지방에서 크고 격렬하게 발생했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이며 특징적인 봉기 중의 하나로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를 들 수 있다. 김사미는 농민출신으로 청도(淸道)에 있는 운문산(雲門山)을 근거로 부근의 농민 유망민을 규합,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다. 한편 초전(草田, 울산(蔚山))에서는 효심이 지휘하는 농민군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작전도 상의하는 등 연합전선의 태세를 갖춘 일면도 있었던 것 같다. 1193년, 이들이 주현을 누비며 맹렬한 항거운동을 전개하자 조정에서는 대장군 전존걸(全存傑)에게 장군 이지순(李至純)·이공정(李公靖) 등을 거느리고 나아가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토벌군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패배를 거듭하여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고려사> 이의민전(李義旼傳)에 의하면, 당시 실권자의 아들인 이지순이 토벌군 지휘자로 있으면서 반란군과 내통, 작전기밀을 누설하고 반란군에게 군수물자를 원조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토벌군 사령관인 전존걸은 이지순의 통모행위를 알고 있었으나, 「법에 따라 처벌하면 그의 아버지가 나를 죽일 것이고 처벌하지 않으면 적의 세력이 더욱 강력해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궁지에 몰려 자살하고 말았다. 은 자신의 권력을 확대하고 새 왕조를 세우기 위해 이들 농민봉기를 이용했으며, 김사미 등은 경주출신이며 경주이씨의 일족인 이의민을 이용, 그들의 소망인 의 부흥을 실현하고자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봉기는 당시 농민·천민봉기에서와 같은 계급적인 문제뿐 아니라 경주인의 신라부흥운동을 비롯, 당시의 지역감정문제와 경주이씨의 족적 유대의식 등 상당히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조정에서는 그해 11월 다시 상장군(上將軍) 최인(崔仁)과 대장군(大將軍) 고용지(高湧之)를 보내 대적케 해, 이듬해 2월 김사미가 항복함으로써 진압되었다. 효심 등은 그 후에도 계속 대항했으나 대규모의 토벌군에게 밀리던 중 밀성(密城, 밀양(密陽))싸움에서 한꺼번에 7천 명이 죽음을 당하는 참패를 당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고, 12월 효심이 사로잡힘으로써 항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운문을 근거로 한 농민봉기군이 계속 존재하여 정부에 반기를 들었음은 밀성 관노 투속사건이나 에서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