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적의 봉기

만적의 봉기

[ 萬積-蜂起 ]

시대명 고려
연도 1198년(신종 1년)

1198년(신종 1), 개경에서 만적 등의 들이 일으킨 봉기.

12세기에는 (田柴科)로 대표되는 고려 전기의 지배체제가 동요되는 가운데 농촌사회가 급속히 해체되고 농민의 유망이 가속화되었으며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농민봉기는 이후 정권 기반 마련을 위해 지배계급의 수탈이 강화되자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게다가 이후 계속된 정변으로 인한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지배력 약화는 무신정변 이후의 정권다툼으로 더욱 약화되었으며, 또한 무신정변 이후 미천한 신분출신의 무인들이 정권을 잡자 전통적인 신분질서가 무너지면서 피지배층의 사회의식이 성장했던 것도 봉기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농민봉기뿐 아니라 천민들의 신분해방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노비가 주체가 되어 일어난 만적의 봉기이다.

1198년 5월, 의 사노(私奴)였던 만적은 개경 북산(北山)에서 나무를 하던 중 같이 일하던 공사노비들을 불러모아, 「무신의 난 이후에 고관(高官)이 천한 노예에서 많이 나왔으니 장상(將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다」라고 선동하며 반란을 모의했다. 이들은 갑인일(甲寅日)에 흥국사(興國寺)에서 모여, 궁중으로 몰려가 환관과 궁노들의 호응을 받아 먼저 최충헌을 죽인 다음 각기 자기 주인들을 죽이고 노비문서를 불사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약속한 날 수백 명밖에 모이지 않아 며칠 뒤에 다시 모이기로 했는데, 순정(順貞)이란 자가 자기 주인에게 밀고해 만적 등 백여 명의 노비가 강물에 던져짐으로써 봉기는 무산되었다.

비록 사전에 무산되긴 했지만 만적의 봉기는 신분제를 부정하고 지배계급을 송두리째 무시하면서 노비문서를 불사를 것을 계획하는 등 그 목표가 신분해방투쟁임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정권을 탈취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신분해방운동은 그 뒤에도 계속 일어났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천민의 봉기는 그들의 사회적 성장·발전을 촉진했으며,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노비와 천민의 봉기는 신분제 와해를 더욱 촉진하여 이후 사회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