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임

이인임

[ 李仁任 ]

시대 고려
출생 - 사망 미상 ~ 1388년(우왕 14년)
본관 경산부(京山府, 성주(星州))
직업 문신

고려의 문신. 본관은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성주(星州)).

그의 가문은 성주지방에서 대대로 호장직을 이어오다 할아버지 이조년이 를 통해 관직에 오르면서 중앙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즉위 초 문음으로 관계에 진출, 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의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1365년 이 개혁을 추진할 때 에서 주업무를 맡아 보는 등 실무를 장악했으며, 이후 그의 지위는 계속 올라가 1368년 좌시중(左侍中)이 되었다. 1371년 공민왕이 신돈을 숙청하고 모니노(牟尼奴, 뒤의 우왕)를 명덕태후(明德太后)에게 들일 때도 그의 위치는 좌시중으로서 흔들리지 않았으며, 다시 등장한 보수성향의 무신세력과 제휴해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져나갔다. 1374년 공민왕이 죽임을 당한 후 이인임은 우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는 데 성공하여 권력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때 이인임은 그때까지의 외교정책을 버리고 원나라와 명나라에 두 다리를 걸치는 양단외교(兩端外交)로 방향을 바꾸어, 그 동안 멀어졌던 원나라(당시는 북원(北元))와 다시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한편, 명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끊지 않고 을 파견했다. 이러한 외교정책의 전환은 신진세력의 맹렬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그는 (崔瑩)·지윤(池奫) 등과 힘을 합해 1379년(우왕 5)까지 반대세력을 대부분 몰아내고 이후 지윤·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과 함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1382년 이후 실권이 약해져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1386년 다시 좌시중이 되었지만 이듬해 노병으로 사직했다. 1388년, 우왕은 최영·이성계(李成桂)와 의논해 염흥방·임견미·왕복해(王福海) 등을 처단하고 그 일파를 유배시켰는데, 이때 이인임도 경산부에 안치(安置)되었다가 곧 죽었다. 그러나 그의 형제나 자식들에게는 별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 같다. 동생인 이인립(李仁立)은 이성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사위인 강서(姜筮)와 조카사위 (河崙), 조카인 이제(李濟)·이직(李稷) 등은 조선건국 후 재상직에 올랐다. 즉 그의 가문은 종래의 뿐 아니라 신진세력과도 연결되어 있었고, 이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이인임은 공민왕 이후 새롭게 성장하는 신진세력과 권문세족이 상충하는 과도기를 이끌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