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

이제현

[ 李齊賢 ]

시대 고려
출생 - 사망 1287년(충렬왕 13년) ~ 1367년(공민왕 16년)
본관 경주(慶州)
이명 : 중사(仲思)
: 익재(益齋), 역옹(櫟翁)
시호 : 문충(文忠)
초명 : 지공(之公)
직업 학자, 정치가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의 삼한공신 후예이나, 아버지 진(瑱)이 신흥관료로서 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가문이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했다. 1301년 과거에 합격, 1314년 상왕인 의 부름으로 원나라에 가서, 에 머물며 요수·염복·원명선·조맹부 등 문인들과 교류하며 학문과 식견을 넓혔다. 충선왕이 유배된 후 충숙왕을 내몰고 (瀋王) 고(暠)를 옹립하려는 일파의 책동과 이와 관련한 이 일어나자 입성반대 상서를 올리기도 했으며,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여러 항목에 걸친 폐정개혁안을 제시했다.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琪, 뒤의 )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었다. 1356년 (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 벼슬을 그만두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한 온건정치가였다.

한편으로는 뛰어난 유학자로 의 수용·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白頣正)의 제자였고, 를 간행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으며, 과 부자가 그의 제자였다는 점에서 성리학의 학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또한 문학부분에서도 고려의 한문학을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역사학 부문에서도 만년에 를 편찬했으나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10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 2권인데, 흔히 이것을 합하여 <익재집>이라 한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