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여

균여

[ 均如 ]

시대 고려
출생 - 사망 923년(태조 6년) ~ 973년(광종 24년)
본관 황주(黃酒)
본명 균여(均如)
직업 고승

고려 초기의 고승. 본관은 황주(黃酒), 속성은 변씨(邊氏), 균여는 이름이다.

아버지는 환성(煥性)이며, 어머니는 점명(占命)이다.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했는데, 그의 어머니는 60세에 임신하고 7개월 만에 균여를 낳았다고 한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15세 때 사촌형 선균(善均)을 따라 출가, 영통사(靈通寺)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는 화엄종의 남악(南岳)과 북악(北岳) 양 종의 대립을 개탄, 북악의 법통을 계승하여 남악까지 종합해 독자적인 입의정종(立義定宗)을 확립했는데, 그의 설은 승시(僧試)에서 정통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964년( 15), 광종이 그를 위해 발원하여 송악산 아래에 창건한 귀법사의 주지로서, 왕명에 따라 제사를 받들며 민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펴다가 973년 입적, 팔덕산(八德山)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생애는 1075년(문종 29) 혁련정(赫連挺)이 지은 균여전>에 전해져온다.

그는 화엄교리의 거장으로서, 그의 화엄사상은 공(空)을 뜻하는 성(性)과 색(色)을 뜻하는 상(相)을 원만하게 융합시킨 의 이론이다. 이는 화엄사상 속에 법상종의 사상을 융합해 교종 내의 대립을 해소키 위해 주창한 통합사상으로서, 균여가 <원통대사>로 불렸고, 그의 저술에 <원통>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던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그의 화엄사상 속에는 순수교리적인 측면보다 토착적 신앙을 내세우는 신이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서민적이고 세속적이었던 그의 사상경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균여의 사상은 고려 중기의 (義天)에 의해 심하게 배척되어 의천의 저술에서 그의 책은 의식적으로 제외되었다. 그러나 이후 이 크게 일어나면서 환영을 받아, 당시 조판된 고려대장경속에 균여의 저술이 포함되었다. 저술로는 10권, 8권 등 다수가 있는데, 포교의 방법으로 방언, 즉 로써 불경을 번역하기도 했다. 불교 이외의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에 익숙해 를 지음으로써 국문학사상 큰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