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별초군의 봉기

경주 별초군의 봉기

[ 慶州別抄軍-蜂起 ]

시대명 고려
연도 1202년(신종 5년)

1202년(신종 5), 경주의 별초군이 일으킨 봉기.

별초군은 정규군 외에 결사대·선봉대·별동대의 성격을 갖는 특수부대를 뜻하며, 특히 무신정권기에 많이 나타났다. 별초군에는 중앙의 경별초(京別抄) 외에 지방에 있는 주현별초(외별초라고도 함)가 있었는데, 이 중 경주의 별초군이 봉기한 것이다. 이들은 1202년 10월, 운문의 농민봉기군과 부인사(符仁寺)·동화사(桐華寺)의 승려를 끌어들여 영주를 공격했다. 이에 영주 사람 이극인(李克仁)·견수(堅守) 등이 정예를 거느리고 싸우자 경주 별초군은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이때

당시 집권자였던 은 군사를 내 경주를 토벌, 난의 뿌리를 뽑을 것을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경주 사람들은 「부흥」을 표방하고 장군 석성주(石成柱)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오히려 석성주가 이를 밀고하여 실패했다. 이에 봉기군은 항복을 청했으나 최충헌은 강경한 토벌의 입장을 고수하며 초토처치(招討處置兵馬使)를 3도로 나누어 파견, 이를 진압했다. 봉기가 진압된 1204년(희종 즉위년)에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지경주사(知慶州事)로 강등하고 경주 관할의 주부군현과 향 을 안동과 상주에 나누어 소속시켰으며, 경상도(慶尙道)를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개칭했다. 경주 별초군의 봉기는 경주인의 신라부흥운동과 연결되어 고려왕조를 부인하는 정치적 색채를 띠는 것이 주목된다. 이것이 당시 지배체제에 항거하는 농민봉기 세력과 무신정권에 불만을 품은 교종 승려세력과 연결되어 대규모의 봉기로 전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