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의 난

이자겸의 난

[ 李資謙-亂 ]

시대명 고려
연도 1126년(인종 4년)

1126(인종 4) 사회 내부의 모순으로 일어난 정변.

문종조를 전후하여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려 귀족사회는 지배층간에 정치적·경제적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상호경쟁·대립하는 양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그 내부 모순도 점점 심화되어갔는데, 이자겸의 난은 이러한 모순이 폭발되어 일어난 정변이다. 의 가문은 문종 때부터 외척으로 세력을 떨쳐왔던 경원이씨(慶源李氏, 인주이씨(仁州李氏))로, 이자겸은 그의 둘째딸이 예종비로 들어가 원자(元子, 뒤의 인종)를 낳자 재상의 반열에 서는 등 지위가 크게 올랐다. 그러나 예종 때는 신진관료로서 왕의 측근세력을 이루고 있던 (韓安仁) 등과 대립해 이들의 견제를 받았다. 그 후 1122년 4월 예종이 죽자 이자겸은 자기집에서 성장한 14세의 어린 외손인 인종을 즉위시켰으며, 그해 12월에는 모역사건을 날조해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보(俌)와 한안인·문공인(文公仁)·이영(李永) 등을 제거했다. 정적을 숙청한 후 이자겸의 세력은 왕을 능가했으며 남의 토지와 재물을 강탈해 부를 축적, 이를 기반으로 사원을 포섭하고 나 사병을 증가시켜 더욱 세력을 확장했다.

이때 내시 김찬(金粲)·안보린(安甫鱗) 등이 하급관료와 무관인 지녹연(智祿延)·최탁(崔卓)·오탁(吳卓) 등과 함께 이자겸 세력을 타도하고자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를 계기로 이자겸은 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궁궐에 불을 지르고 반대파를 살상했다. 이 같은 난리를 당해 인종은 한때 왕위를 이자겸에게 넘기려 하기도 했으며, 이자겸은 「십팔자(十八子)의 참설」을 믿어 두 차례나 왕을 독살하려 했으나 뒤에 폐비되는 이씨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이 반란은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이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이간시켜 척준경이 이자겸 일파를 숙청하고 1127년에는 정지상(鄭知常) 등에 의해 척준경도 제거됨으로써 수습되었다. 반란이 진압됨으로써 왕을 둘러싼 문벌귀족의 연합지배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으나, 이를 계기로 귀족사회는 크게 동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