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노비

[ 奴婢 ]

시대명 고려

우리나라 전근대사회에서의 최하층 신분.

통속적으로는 「종」이라 불렀는데, 노(奴)는 사내종, 비(婢)는 계집종을 뜻한다. 원시공동체사회가 해체되고 계급사회로 들어오면서 노비제가 발생해, 고조선의 8조법이나 부여의 법률에서도 노비제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후 철기문화 전래로 생산력이 증대되고 정복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노비의 수는 더욱 증가되었다. 노비의 존재는 삼국이나 통일신라에서도 확인되나, 그 실체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고려 때부터이다. 노비는 크게 국가에 속하는 공노비(公奴婢, 관노비(官奴婢)·공천(公賤))와 개인에 속하는 사노비(私奴婢, 사천(私賤))로 구분 되었는데, 공노비는 전쟁포로에서 얻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반역자나 전쟁 중에 적에게 투항했거나 이적행위를 한 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던 사노비가 몰수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공노비는 다시 특정 관아에서 잡역에 종사하는 공역노비와 주로 농경활동에 종사하는 외거노비 또는 농경노비로 구분된다. 공역노비는 국가로부터 일정한 급료를 받아 생활했으므로 독자적인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비교적 자유스러운 결혼 및 가정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60세가 되면 역이 면제되었으므로 사노비에 비해 부담이 가벼운 편이었다. 외거노비는 주로 국유지를 경작하여 그 수확의 일부를 조(租)로 납부하고 소정의 공역을 부담했다. 공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외거노비였는데, 고려 후기로 가면서 공역노비도 점차 외거노비화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편 사노비는 그 소유주의 주요한 재산으로 취급되어 매매·상속·증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주인의 호적에 부적되어 파악되고 있었으며 성은 없고 이름만 있었다. 이들은 혼인에 있어서도 신분의 제한을 받아 원칙상 같은 노비 사이에 결혼하는 동색혼(同色婚)만이 인정되며 양천교혼(良賤交婚)인 경우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 모두 천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소유권은 1039년(정종 5)에 제정된 천자수모법(賤者隨母法)에 의거해 어머니 쪽 소유주에게 귀속했다. 사노비는 보통 소유주와 같은 집에 거처하면서 잡역에 종사한 솔거노비(率居奴婢)와 주인과 떨어져 외지에 거주하면서 주로 농경에 종사한 외거노비로 구분되는데, 외거노비는 독자적인 재산을 가지고 가정도 온존시켜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솔거노비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며 이들의 경제적 처지는 양인전호와 비슷했다. 특히 고려 후기에는 외거노비의 수가 크게 증가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지위도 점차 향상되었는데, 이 시기에 양인농민들이 유력자에게 투탁(投託)하여 스스로 노비가 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도 이러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