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부여

[ 夫餘 ]

시대명 고대/초기국가

우리나라 초기국가의 하나로 북부여라고 하기도 한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건국신화에 의하면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북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 때 다시 동해 기슭의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이동하여 동부여라고 했으며, 그 뒤를 이어 금와 대소가 왕이 되었다고 한다. 부여의 건국설화는 의 건국설화와 관련되어 있는데, 천제의 아들 해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동명(주몽)이 북부여의 박해를 피해 땅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하고 있다. 이는 고구려와 부여가 같은 종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부여는 BC 4~3세기경 국가의 형태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기원을 전후로 하는 시기에 이르면서 요하 상류와 송화강 유역에 자리 잡고 남쪽으로는 고구려, 동쪽으로는 , 서쪽으로는 선비족과 국경을 접했다. 인구는 약 8만 호였으며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는 지역이었다. 또 기원을 전후로 하는 시기에 중국의 연·한·위 등과 관계를 맺고 교류를 했다. 부여에는 마가·우가·구가·저가 등이 가(加)계급을 형성했으며, 그 밑으로 대사, 대사자, 사자 등의 관직이 있었다. 가계급은 전쟁의 선포, 형벌의 적용 등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평의회를 구성했으며, 의 를 지배했다. 읍락은 호민과 하호로 구성되었는데 하호들은 노복(奴僕)과 같은 처지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계급이 전쟁에 나서고 하호들은 양식을 나르는 일을 맡았다. 지배계급은 궁전·창고·감옥·성 등을 갖추고 있었다.

부여의 법은 살인하는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로 삼았으며, 도둑질한 자는 12배로 물게 하는 1책 12법이 있었다. 부정을 저지른 남녀는 모두 죽였으며 특히 여자들은 죽인 후에 시체를 산마루에 버렸으며, 그 가족이 시체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소나 말을 내야 했다. 지배계급은 많은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으며, 부유한 지배계급인 경우 100여 명 정도의 노비를 시킬 수 있었다. 또한 지배계급은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하고 비단옷을 입는 등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대체로 부여사람들은 흰옷을 즐겨 입고 매우 낙천적인 생활을 했다. 정월달에는 제천행사인 가 행해졌다. AD 21년~27년에 부여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었으며, 고구려의 속국화했다. 그 뒤에도 명맥을 유지하면서 주변 상황에 따라 군사를 동원하여 다시 독립된 국가로서의 지위를 되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나 410년에 고구려에게 다시 큰 타격을 받았으며 결국 494년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