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성 전투

강동성 전투

[ 江東城戰鬪 ]

시대명 고려
연도 1218년(고종 5년) ~ 1219년

1218년(고종 5)부터 1219년에 걸쳐 고려··동진(東眞)의 연합군이 강동성에 침입한 거란적(契丹賊)을 물리친 전투.

13세기 초 몽골족의 세력이 확대되고 금나라의 세력이 위축되자 금의 지배를 받아온 거란인은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 세력의 일부가 몽골병에게 쫓겨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들은 고려의 북방지역을 노략하며 또 수도 개경까지 위협했다. 이에 고려는 조충(趙沖)을 서북면 원수, (金就礪)를 로 임명하여 적을 치게 해, 마침내 그들의 주력부대를 평양 동쪽에 있는 강동성에 몰아넣었다. 이무렵 금나라의 장군 포선만노(浦鮮萬奴)가 자립하여 지방에 동하(東夏, 동진국(東眞國))를 세웠는데, 몽골의 원수 합진(哈眞, 카진) 등은 이를 신종(臣從)케 한 다음 자신이 거느린 몽골이군 1만과 동진의 군사 2만과 연합 「거란적을 토벌한다」고 선언하면서 고려의 동북면 지방으로 남하해 그곳의 거란족을 차례로 무찌르고 강동성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때 폭설로 군량미의 보급이 어렵게 된 몽골과 동진의 연합군은 고려에 식량원조와 함께 강동성에 대한 공동작전을 제의했다. 고려는 망설이다 결국 협력하기로 하고 군량미를 보내며 몽골·동진군과 합세해 무난히 강동성을 함락했다(1219년).

이로써 고려에 침입한 거란적의 난은 일단락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고려는 몽골과 비로소 접촉을 갖게 되었고, 형제의 맹약을 맺어 몽골의 간섭을 받는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강화 직후 합진은 강동성에 억류되어 있던 우리 백성 200명과 거란인 포로 7백 명을 고려에 돌려주었다. 조충과 김취려는 거란인 포로를 모두 고려의 백성으로 삼아 각도의 주현에 나누어 토지를 주어 모여 살게 했는데, 그곳이 거란장(契丹場)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