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취려

김취려

[ 金就礪 ]

시대 고려
출생 - 사망 미상 ~ 1234년(고종 21년)
본관 언양(彦陽)
이명 시호 : 위열(威烈)
직업 무신

고려 후기의 무신. 본관은 언양(彦陽). 아버지는 예부시랑을 지낸 부(富)이다.

음서(蔭敍)로 정위(正衛)가 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으며, 이후 장군이 되어 동북계를 맡아 지켰고 대장군에 발탁되었다. 몽골족의 세력확대로 금나라가 쇠퇴하자 금나라의 지배를 받던 인들이 반기를 들어 자립했는데, 이들 또한 몽골병에 쫓겨 1216년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들어왔다. 이때 그는 대장군으로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朝陽鎭)에서 거란군을 물리쳤으며, 연주(延州)에서는 앞장서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하여 거란군 2천4백 명을 베거나 사로잡았다. 1217년 거란군 5천여 명이 다시 남으로 내려오자 상장군으로 전군에 임명되어 거란군사를 명주(溟州, 강릉) 방면으로 패주시켰고, 1218년 거란이 또다시 침입하자 병마사가 되어 서북면 원수 조충(趙沖)과 함께 적을 강동성(江東城)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거란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고려의 동북면 지방으로 남하해 온 ·동진 연합군의 공동작전 제의로 이들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1219년 의주별장 한순(韓恂)과 낭장 다지(多智) 등의 반란을 이극서(李克偦)·이적유(李迪儒)와 함께 평정하는 등의 공적을 인정받고 계속 승진, 1228년에는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守太尉中書侍郞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으며 그 뒤 시중에 제수되었다. 고종(高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