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농민봉기

서북농민봉기

[ 西北農民蜂起 ]

시대명 고려

무신정권 초기에 서북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문벌의 수탈로 농민들의 유망(流亡)이 늘어나던 12세기 중엽 의종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특히 이후 정권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지배계급의 수탈이 더욱 강화되자 커다란 규모의 농민봉기가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는데, 무신정권 초기부터 가장 치열하게 봉기한 것은 서북지방의 농민들이었다. 서북지방의 군대와 농민들은 사신접대비와 군사비 명목으로 원래부터 가혹한 수탈을 받아왔기 때문에 무신집권 이후 수탈이 더욱 강화되자, 1172년 6월 관아를 습격하여 과 를 죽이며 들고 일어났다. 이들 농민군은 1174년 유수 (趙位寵)이 난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싸웠으며, 1176년 서경이 함락된 이후에도 관군에 항복하지 않았던 농민들이 1177년 다시 봉기했는데, 정부에서는 이들을 「조위총의 여중(餘衆)」이라고 했다.

이들은 서경을 다시 장악하고 5개월간 관군에 맞서 항쟁하다 같은 해 9월 군사활동에 유리한 묘향산으로 이동했다. 묘향산으로 들어간 농민군은 서북지방 각지의 고을을 습격하며 폭넓게 활동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식량사정이 어려워졌고, 서북면 박제검(朴齊儉)의 회유책에 넘어간 몇몇 지휘관들이 투항함으로써 1178년 10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다음해인 1179년(명종 9) 서적유종(西賊遺種)으로 표현된 서북지방 농민들의 봉기가 다시 일어났는데, 서북면지병마사 이부(李富)가 식량을 주겠다고 성내로 유인한 뒤 모두 학살해 버렸다. 서북지방에서는 이외에도 많은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러한 서북지역 농민봉기는 국가의 통제력을 약화시켜 남쪽지방에도 농민봉기가 일어나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