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

묘청

[ 妙淸 ]

시대 고려
출생 - 사망 미상 ~ 1135년(인종 13년)
이명 이칭 : 정심(淨心)
직업 승려

고려 중기의 승려. 일명 정심(淨心).

의 중으로 1128년(인종 6)에 백수한(白壽翰)이 검교소감(檢校少監)으로 서경의 분사(分司)에 있을 때 그의 스승이 되어 그와 함께 음양도참설을 바탕으로 서경천도를 주장했다. 이는 서경출신 관료 정지상 등의 지지를 받아 대대적인 서경천도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서경천도운동은 서경출신 신진관료들이 개경의 문벌 세력에 대항, 그들의 정권장악을 도모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아울러 이들은 외교정책도 칭제건원·금국정벌론을 주장하면서 개경 문벌귀족과 대립했다. 이들의 주장에 따라 1128년 11월에 임원역지(林原驛地)에 대화궁을 착공, 이듬해 2월에 완성했으며 왕은 이속에 자주 순어(巡御)하기도 했다. 그러나 등 개경 문벌귀족은 이에 반대했고, 서경에서 재변이 자주 일어나자 반대세력은 묘청의 처단을 요구하는 등 더욱 격렬한 분위기를 조정해갔다.

그런 가운데 1134년 8월 왕의 서경행차가 김부식 등의 반대로 좌절되자 묘청은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1135년 정월에 서경에서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분사병부상서 유참(柳旵) 등과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의 군대는 순식간에 절령(岊嶺, 자비령) 이서의 서북 일대를 석권, 자비령 길을 차단하고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했다. 그러나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정부토벌군의 계략으로 묘청은 유참과 참의 아들 호와 함께 조광에 의해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