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건달이 일본의 정세에 관한 일로 보낸 자문

[조선 선조]건달이 일본의 정세에 관한 일로 보낸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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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차 총독 계요 보정 등처 군무 겸 리양향 경략 어왜 도찰원 우도어사 겸 병부 우시랑 건(蹇)이 적정(賊情)에 관한 일로 보낸 자문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이 보낸 자문을 받아보니 ˝만력 30년 11월 20일에 경상도 관찰사 이시발(李時發)이 치계한 내용에 의하면 「좌도 수군 우후 안이명(安以命)의 비보(飛報)에 『본월 20일 신시(申時)에 황령산(荒嶺山) 요망군(瞭望軍) 전응택(全應澤) 등이 달려와 고하기를 [왜선 3척이 절영도(絶影島) 외양으로부터 다가오고 있다.]고 하기에, 비직(卑職)이 즉시 각 초(哨)의 병선으로 하여금 에워싸게 하고 신문해 보았더니, 대마도(對馬島) 왜인 귤지정(橘智正) 등 20명의 말이 [도주(島主) 평의지 등이 사로잡아 간 남녀 1백 29명을 쇄환하는 것이다.]고 했고, 아울러 적추의 서계 11장도 가지고 왔다. 비직이 나오게 된 연유를 심문했더니, 귤지정의 말이 [평의지와 평조신 등이 강화하는 일이 아직도 가부(可杏)의 결정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로 하여금 다시 와서 탐문하게 한 것이다.]고 하기에, 비직이 즉시 경략 군문 만(萬)의 유첩(諭帖)을 가져다가 귤지정에게 주고, 이어 그 왜적들 20명을 절영도에 내려 놓았다.』 하였다. 왜적의 서계를 첨부하여 일체를 치계한다.」 하였습니다. 이에 예조의 관원으로 하여금 왜적의 서계를 가져다 보도록 했더니, 평조신이 보낸 서계의 대략에 「만일 조정 의논이 강화하기를 결정했다면, 우선 알려주기 바란다. 우리나라의 여러 명인(名人)들이 모두 덕천가강(德川家康)의 휘하에 속해 있고, 살주 태수(薩州太守) 도진씨(島津氏)도 또한 지난 번에 왕경(王京)으로 사죄하려 들어갔으니 의심할 것은 하나도 없다.」 했고, 풍신정성(豊臣正成)의 서계에는 「평조신이 여러 차례 두 나라의 강화하는 일을 아뢰니, 내대신(內大臣) 덕천가강(德川家康)이 평조신을 향해 흉금을 터놓고 토로하기를, 귀국에 품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 또 평조신이 왕경으로 들어갔으니, 귀국은 빨리 신사(信使)를 차임(差任)하여 보내서 강화하는 증험을 보이는 것이 곧 두 나라의 백성들에게 커다 란 행복이 될 것이다.」 했으며, 그 나머지 9장의 왜적들 말은 대략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또 지난해 12월 5일 경상도 관찰사 이시발이 치계한 것에 의거하건대 「본년 11월 22일에 통령 모병 천총관(統領募兵千總官) 전계신(全繼信)의 정문(呈文)에 『비직이 위임을 받고 절영도에 나아가 왜인 귤지정에게 나오게 된 사유와 사항을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일본 대신 가강이 우리 도주(島主)에게 분부하여 강화에 관한 한 가지 일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하고, 혹시라도 성사하지 못하면 마침내 큰 죄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므로, 이에 따라 평의지와 평조신이 우리들을 보내 가부(可否)의 결정을 알고 오게 한 것이다. 바라건대 시급히 사신을 내보내 가강의 처소에 가도록 해야 귀국이 화를 면하게 될 것이다. 만일 믿을 수 없다면 우리들을 잡아다 맹금(盟禁)해 놓고, 저들의 하는 짓을 살펴서 허실을 시험해 본 뒤 과연 거짓이었다고 판명이 되면 죽여도 좋다.] 하기에, 비직이 답변하기를, [본국은 천조의 속번이므로 모든 일을 천조가 처치하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렇게 문답하는 동안 곁에서 참여하여 듣고 있던 왜인 하나가 있었는데, 비직이 전년에 밀탐하려고 바다로 나갔을 때 얼굴을 알게 된 사람으로 곧 대마도(對馬島)의 소태수(小太守)였다. 비직이 이 왜인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모읍(某邑)의 태수였었는데 지금 어떻게 해서 귤지정의 하졸(下卒)이 되었는가?] 하니, 왜인이 얼굴빛을 바꾸며 [죄를 얻는 바람에 벼슬을 잃고 나서는 생활하기가 더욱 어려워 상품 몇 가지를 가지고 뒤따라 나왔다.] 하였다.』 하였다. 이를 받고서 신이 비로소 귤지정이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은근히 강요와 위협을 하고 심지어는 대마도의 소태수까지 관명을 바꾸고서 하역(下役)이 되어 뒤따라와서 밀탐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더욱 그들의 속셈을 헤아리기 어렵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본년 1월 9일에 본관이 치계한 것에 의거하건대 「동래 부사 이계선(李繼先)의 비보에 『본년 2일 해시에 왜선 한 척이 <중략>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6월 9일(갑오)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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