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조]유황상과 원황이 조선 정부에 중국군의 상황과 진군에 대해 보낸 자문

[조선 선조]유황상과 원황이 조선 정부에 중국군의 상황과 진군에 대해 보낸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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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략 찬획 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 어왜 사무에 흠차된 4품관 병부 무고 청리사 원외랑(兵部武庫淸吏司員外郞) 유황상(劉黃裳)과 직방 청리사 주사(職方淸吏司主事) 원황(袁黃)이 이자(移咨)하였다. ˝대개 급히 진병하여 왜적을 섬멸하고 곧바로 왕경(王京)을 수복하여 영원히 안정할 계획을 세우는 것은 누군들 그렇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 오래 머무르는 것이 어찌 나의 좋은 밭을 버려 두고 남의 메마른 땅을 가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병화(兵火)가 천리를 적지(赤地)로 만들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데 집을 멀고 떠나 수레 밑에서 지내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대저 천병(天兵)이 동쪽으로 나온 것은 황제의 인자함에서이고 그대 나라의 왜적 침략을 가련히 여긴 것은 곧 성심(聖心)의 남다른 은혜에서이므로, 군사의 나아감을 누가 감히 청하며 군사의 물러남을 누가 감히 만류하겠습니까. 경략과 병부가 명을 받들어 황제의 성덕을 선양하고 황제의 위엄을 포장할 뿐, 시기를 살피고 형세를 헤아리는 것은 숨겨야 하는 기밀인데 누가 감히 엿볼 수 있겠습니까. 지금 평양을 이기고 황주를 되찾고 개성을 무찌르고 벽제에서 싸우고 함경도에서 몰아내기를 마치 바??옅은 안개를 쫓고 불이 마른 풀을 태우듯이 하여 삼한 백제(三韓百濟)가 이미 태평을 되찾고 창도 황성(蒼島黃城)이 옛터를 회복하였으며, 앞뒤로 벤 왜적의 머리가 2천여 급이고 말과 병기 갑옷과 안장 따위의 노획물이 그 수를 셀 수 없는 등, 두 달이 채 못 되어 큰 승리를 거둔 것이 네 번입니다. 사람이 숨을 돌리지 못하고 말이 쉬지 못한 채 얼음과 눈에 시달려 손가락이 얼어 빠졌으니 또한 괴롭지 않겠습니까. 손님에게 술을 권할 때도 쉬어가며 마시게 하려는 것은 급히 마시다가 토할까 염려되어서인데, 이제 남을 위하여 적을 죽이며 수천 리를 싸워 나아갔는데도 사람을 숨도 돌리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어찌 인정이라 하겠습니까. 지금 장사가 힘껏 싸워 공이 높은데도 공경으로써 위로할 생각은 하지 않고, 군졸이 상처를 싸매고 병을 앓는데도 안타까와 하며 감싸주려 하지 않으며, 말이 병들어 죽은 것이 반인데도 먹이고 치료할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마음 편하게 높이 누워서 마치 사람을 사서 싸움을 시켜 놓고 이긴 자의 주먹이 더 빠르지 않은 것을 괴이쩍어 하듯이 경솔히 자문을 띄워 진격을 채촉하고 있으니, 이것이 무슨 마음입니까. 그대 나라의 군신은 천시(天時)도 보지 못합니까. 2월 비가 그치지 않는데다 얼음이 풀리고 눈이 녹아 내리므로 수렁의 깊이가 두어 자[尺]나 되어 말이 배까지 묻힙니다. 아마도 그대 나라의 군병은 잘 싸우지는 못해도 수렁에는 잘 다닐 수 있는 것 같으니 그대들의 말을 앞세워 보십시오. 우리 군사는 곧바로 뒤를 따를 것입니다. 또 왕경(王京)은 길이 좁아서 평양과 비교가 되지 않으니, 반드시 드나들 산길을 살펴보아 습지를 피하고 마른 땅으로 나아가서 험준한 곳을 빼앗고 평탄한 곳을 점거하여야 됩니다. 어느 곳을 이용해서 매복시키고 어느 곳을 이용해서 기습할 것인가는 또한 지리의 비계(秘計)인데, 어찌 눈을 감고 수렁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선진(宣鎭)의 군대 2천이 이미 왔고, 섭참군(葉參軍)이 훈련시킨 신병(神兵) 1천과 강상(江上)의 비장(飛將) 진인(陳璘)의 군병 3천과 촉(蜀)의 효장(驍將) 유총관(劉總管)의 번병(番兵) 1만과 개원(開元) 2관(關)의 호기(胡騎) 3천이 서로 잇따라 압록강을 건널 것입니다. 그대 나라는 군량이 이미 부족하고 마초도 모자라는데 힘써 넉넉히 준비하여 군사가 올 때를 대비하려 하지는 않고 지레 자문을 보내어 진격을 재촉하니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까. 더구나 평양 동서의 관인(館人)은 지공(支供)이 고갈되었다고 지껄이며 돌아서서 숙덕이고 있으니 앞으로 어떻게 서쪽에서 오는 장수를 맞아서 황사(皇師)를 성심으로 접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서쪽에서 온 군병들이 모두 돌아 갈 생각을 갖고 있으니 한번 철수하여 강대(江臺)에서 지킨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습니까. 이럭저럭 시일을 보내며 게으름을 피우고 지연시켜서 일을 그르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대들은 단지 종이를 자르고 붓을 <중략>
• 출처 : 『조선왕조실록』 선조 26년 3월 20일(을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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