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단종]예조에서 유구국에서 조선인 두 명을 송환시켜준 사실 등을 아뢰다

[조선 단종]예조에서 유구국에서 조선인 두 명을 송환시켜준 사실 등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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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의 사자(使者) 도안(道安)을 예조(禮曹)에서 연회하였다. 예조에서 도안의 말을 기록하여서 아뢰기를, 1. 지난 경오년 에 귀국(貴國) 사람 4명이 표류하다가 와사도(臥蛇島)에 정박하였는데, 그 섬은 유구도(琉球島)와 살마(薩摩)의 사이에 있어서 반은 유구국에 속(屬)하고, 반은 살마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2명은 살마인(薩摩人)들이 데려가고, 2명은 유구국왕(琉球國王)의 동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기포도(岐浦島)를 정벌하다가 이들을 발견하고 사서 국왕에게 바치니, 왕께서 궐내(闕內)에 두고 후하게 무휼(撫恤)하기를 더하였습니다. 1. 중산왕(中山王)이 이르기를, ˝지난해에 우리나라 사람 12명이 조선(朝鮮) 해변의 축산포(丑山浦)에 이르었는데, 조선에서 후대하여 옷과 양식을 넉넉히 주어 돌려 보냈으니, 우리가 지금까지 깊이 감사한다. 이에 두 사람을 항상 안전(眼前)에 두고 의복과 음식을 후하게 주었는데, 네가 지금 마침 왔으니, 내가 매우 이를 기뻐하여 너희들에게 부쳐서 송환(送還)하겠다.˝ 하였습니다. 1. 유구국(琉球國)은 땅이 따뜻하고 수전의 곡식이 1년에 두번씩 익고, 토산은 오직 베와 모시뿐이나, 그러나 상선(商船) 4척이 있기 때문에 사방의 물화를 갖추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조관(朝官)의 의복(衣服)은 중국 사람과 다름이 없으나, 관직(官職)이 없는 사람의 옷은 소매통이 조금 넓은데, 색실[色絲]로써 소매 통에 수(繡)를 놓아서 존비(尊卑)를 구별합니다. 1. 유구국(琉球國)과 살마(薩摩)가 서로 통호(通好)하기 때문에 박다(博多) 사람으로 살마를 거쳐서 유구국에 가는 자는 장애(障碍)가 없었습니다. 근년 이래로 서로 화목(和睦)하지 못하여 노략질을 마구 행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큰 바다를 돌아서 물결에 시달리면서 가므로, 심히 고생스럽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나올 때에 상선(商船) 2척도 또한 창탈되어 사로잡혔습니다.˝ 하고, 박다(博多)·살마(薩摩)·유구(琉球)의 서로 떨어진 지도(地圖)를 내보였다. 또 표류(漂流)하였던 사람 만년(萬年)·정록(丁祿) 등의 말한 바를 기록하여서 아뢰기를, ˝ 경오년 12월에 우리 두 사람과 돌[石乙]·돌돌이[石石今]·덕만(德萬)·강보(康甫) 등 6명이 한 배에 같이 탔다가 갑자기 바다 가운데에서 바람을 만나서 표류하여 와사도(臥蛇島)에 표류 정박하였는데, 강보·덕만은 모두 병사(病死)하였습니다. 섬 가운데 사는 백성들이 30여 호(戶)였는데, 반은 유구국(琉球國)에 속하고, 반은 살마(薩摩)에 속하였습니다. 섬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거느리고 수로로 3일 노정(路程)을 가서 가사리도(加沙里島)에 10여일 동안 억류되었습니다. 유구국 사람 감린이(甘隣伊)·백야귀(伯也貴)가 일로 인하여 본도에 이르렀다가 만년을 보고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튿날 대궐에 나아가서 백단자(白段子)·청단자(靑段子) 각각 2필씩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즉시 나를 거느리고 대궐로 나아갔으니, 나를 반드시 사서 바쳤던 것이라 추측됩니다. 중산왕(中山王)이 말하기를, ˝나이가 어려서 화통(火筒)을 배울 만하니, 화통을 주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3인이 같이 거처하였는데 1인이 저고(苧庫)에 들어가서 모시를 훔치는 것을 내가 마침 이를 보고 일을 맡아 보는 사람에게 고하여 중산왕(中山王)에게 아뢰었습니다. 왕이 말하기를, ˝조선 사람들은 노실(老實)하다.˝ 하고, 인하여 안전(眼前)에 두고 모든 철물(鐵物)·단자(段者)·향목(香木)·동전(銅錢)을 저장하는 창고를 나로 하여금 간수(看守)하게 하고, 창고 안에 출입하는 자들은 옷을 벗고 〈일을〉 보았습니다. 3개월 간 머물렀는데, 유구인 완옥지(完玉之)가 또 가사리도(加沙里島)에 도착하여 동전(銅錢)을 주고 정록(丁祿)을 사서 데리고 돌아와서 일을 시켰습니다. 같은 마을 사람들이 와서 만년에게 고하므로, 만년이 즉시 왕에게 고하니, 만년에게 명하여 역마(驛馬)를 타고 그 집에 가서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노예 1인을 주고 맞바꾸었고 인하여 같이 거처하였습니다. 비단 옷[羅衣] 각각 2벌[領]씩을 내려 주고 하루에 세끼씩 음식을 먹이었는데, 한 때의 쌀이 두 되[升]이었습니다. 3년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도안(道安) 등이 〈섬〉에 들어왔다가 돌아가니, 왕이 말하기를, ˝항상 풀어서 보내고자 하였으나, 길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중략>.
• 출처 : 『조선왕조실록』 단종 1년 5월 11일(정묘)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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