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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언어의 의미·소리·운율 등에 맞게 선택·배열한 언어를 통해 경험에 대한 심상적인 자각과 특별한 정서를 일으키는 문학의 한 장르.
(프). po대체이미지me. (독). Gedicht.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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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의
  2. 기원
  3. 고전적 분류법
    1. 개요
    2. 리트
    3. 오드
    4. 엘레지
    5. 마드리갈
  4. 외적 분류법
    1. 개요
    2. 정형시
    3. 무운시
    4. 자유시
  5. 기타 분류법
  6. 서유럽의 시
  7. 중국의 시
  8. 한국 시의 역사
    1. 한국 시의 개념
    2. 상대시가
    3. 향가
    4. 고려가요
    5. 악장
    6. 시조
    7. 가사
    8. 개화기 시가
    9. 1920년대 시
    10. 1930년대 시
    11. 1940년대 시
    12. 1950년대 시
    13. 1960년대 시
    14. 1970년대 시
    15. 1980년대 시

일반적으로 시라 할 때는 주로 그 형식적 측면을 가리켜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시 작품(poem)을 말하는 경우와, 그 작품이 주는 예술적 감동의 내실적(內實的)인 시정(詩情) 및 시적 요소(poetry)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전자는 좁은 의미의 시로서 일정한 형식에 의하여 통합된 언어의 메아리·리듬·하모니 등의 음악적(청각적) 요소와 언어에 의한 이미지·시각 등의 회화적(시각적) 요소에 의해서 독자의 감각이나 감정 또는 그 상상력에 작용하여 깊은 감명이나 고양된 존재감을 제공하는 것을 의도하는 문학작품의 일종이다. 여기에서는 언어의 감화적(感化的)·정동적(情動的)인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는 언어의 선택·배열·구성이 요구된다.

후자는 넓은 의미의 시를 말하는데, 시작품뿐만 아니라 소설·희곡·수필 등의 문학작품에서 미술·음악·무용·연극·사진·영화·건축 등의 예술작품, 더 나아가서는 자연이나 인간사, 사회현상에 이르기까지 그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의미에서의 시는 대부분 일반적인 본질 그 자체이므로 그들 사이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

정의

시의 정의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많은 시인이나 문학자들사이에서 여러 가지로 논의가 있어왔지만, 여전히 시의 정의를 내리기란 어려운 문제이다.

에드거 앨런 는 "시란 미(美)의 운율적인 창조이다"라고 말했고, 매슈 아널드는 "시는 인생의 비평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시와 산문의 구별을 운의 유무에 따르지 않고 "산문은 좋은 말의 좋은 조합이다"라고 정의했다.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이런 정의들은 모두 시의 본질의 어떤 측면을 특별히 강조하여 말한 것이며, 오히려 이들 시인이 자기 작품을 입증하기 위해 정립시킨 시관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 정의에 비하면 폴 발레리의 다음과 같은 정의는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보다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시는 절규·눈물·애무·키스·탄식 등을 암암리에 표명하고자 하는 것, 또 물체가 그 외견상의 생명이나 가상된 의지로써 표명하고자 하는 그런 것, 또는 그런 것을 절조있는 언어로 표현하거나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시와 산문과의 차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시란 일정한 운율(metre)과 압운(rhyme)을 가진 운문을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시작품을 성립시키는 각 시구(verse)를 가리킨다. 폴 발레리는 이런 의미에서의 시와 산문의 차이를 전자를 무용에, 후자를 보행에 비유했다. 산문은 보행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명확한 하나의 대상을 가지며, 그 대상을 향한 하나의 행동이므로 그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데 비해, 시는 무용과 마찬가지로 행위의 한 체계이기는 하나 오히려 그 행위 자체를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다고 정의하고 있다. 즉 시는 무용과 마찬가지로 어딘가를 목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황홀한 상태, 생명의 충일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 경우 보행과 무용의 공통점은 그때 사용되는 것이 육체라는 점인데, 이것을 시와 산문에 적용해보면 양자는 모두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산문에 사용되는 언어는 의미기호로서의 언어, 즉 전달을 첫째 목표로 삼는 실용적인 언어인 데 비해, 시에 사용되는 언어는 독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는 언어, 즉 감화적·정동적인 기능을 지닌 언어인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시작품에 사용되는 언어가 반드시 의미전달의 기능을 완전히 배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시적 언어의 본질은 그와 동일한 점에 있으며, 이런 생각을 관철시키면 일체의 의미적 전달성을 거부하고 순수한 시적 감동의 창출만을 의도하는 이른바 순수시의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의 가치는 그 글에 의해 전달된 사실 또는 환기된 영상 그 자체의 사회적 가치나 그 글을 구성하는 음운이나 관념의 미적 가치와는 별개의 것이다. 현대의 시인들 중에는 신문의 보도기사나 백과사전의 기술을 그대로 시로 나타내는 실험도 시도하고 있다. 실제로 역사상에 나타난 갖가지 시관이나 그것에 기초한 사조와 유파의 교체는 그와 같은 시적 영위를 평가할 때 거기에 숨겨져 있는 지적 긴장이나 언어조작 기술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직관성이나 자발성을 중시하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기원

시의 기원은 역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마 언어 그 자체의 기원과 동일하기 때문에 이에 관한 고찰은 모두 가설일 수밖에 없겠으나 일반적으로 원시농경사회의 풍년을 비는 제례의식에서 읊었던 주문(呪文)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인간의 탄생이나 죽음, 구애나 혼인 같은 강렬한 감동이나 기도 등에서도 특별한 언어활동이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농사 등의 집단작업에서 그 리듬을 외쳐 끊임없이 공동체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 불려졌던 노동요에서도 유래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문자의 발명 이전에는 각각의 공동체의 존재이유·역사·습관·규율 등을 노래에 의해 전승시킬 필요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기억하기에 편리하고 듣는 이들에게도 감동을 주는 운율형태를 갖춘 서사시나 교훈시가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민족이나 그 문명의 초기 단계부터 종교적·주술적 송가(頌歌), 설화적 서사시, 서정적 가요 등을 가지고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그것을 반복해서 사용해오던 중 점차 그 가사가 정해지고, 특별한 제의나 궁정행사 등을 중심으로 전문적인 낭송자가 생겨난 데 이어 전문적인 작사자도 나오게 되었을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것들 중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고대 바빌로니아의 〈길가메시 이야기 Gilgamesh Epoth〉(BC 2000), 고대 인도의 고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 Mahābhārata〉·〈라마야나 Rāmāyana〉,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텍스트〉와 신들에게 바치는 찬가(讚歌),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쓴 서사시 〈오디세이아 Odyssey〉·〈일리아스 Iliad〉, 〈구약성서〉에 포함된 고대 히브리 민족의 운문시가서인 〈시편〉·〈아가〉·〈예레미야의 애가(哀歌)〉 및 〈이사야〉 일부와, 고대 중국의 〈시경 詩經〉 등이 유명하다.

마하바라타 (Mahābhārata)
마하바라타 (Mahābhārata)

고전적 분류법

개요

시는 서사시(epic)·서정시(lyric)·극시(dramatic poetry)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러한 분류는 서양 시에서 아주 일찍부터 써온 방법이다. 서사시는 민족·국가의 역사나 전승 및 영웅의 사적(事績)을 각각의 사건에 따라 이야기식으로 기술한 것으로, 그 내용이 보다 객관적이고 긴 것이 특징인데 고대·중세 시대에 많이 씌어졌다. 한편 서정시는 개인의 내적 감정이나 그 주정적 감회를 표현한 것으로, 근대시(近代詩)의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내용은 주관적이고 매우 짧다.

이 서사시와 서정시의 중간에 발라드(ballad) 또는 짧은 이야기체 시인 담시(譚詩)가 있는데, 이것들도 넓은 의미로는 서사시에 포함된다. 유럽 시에서 말하는 발라드(ballade)는 민간전설이나 역사적 전승을 민요조로 노래한 짧은 이야기 시인데, 이 시는 긴 사건의 앞뒤를 잘라버리고 단일 에피소드만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극시는 복수(複數)의 화자(話者)를 가진 표현형식인데, 주로 운문으로 씌어진 극을 의미한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와 괴테 이후에 거의 쇠퇴하여 오늘날에는 P.L.C. 클로델과 T.S. 엘리엇 등 몇 명을 제외하고는 산문극(散文劇)에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서정시를 가리키는 영어의 'lyric poem'은 고대 그리스 시대에 리라(lyra)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 데서 유래된 호칭이다. 그리스의 서정시인 사포(BC 612경~580경 활동)를 태두로 오늘에 이르는 유럽의 저명 시인들은 거의 모두 서정시인이라고 해도 좋고, 또 한국의 향가(鄕歌)·가사(歌辭)·시조(時調)·속요(俗謠) 등도 대부분 이 서정시의 범주에 속한다.

유럽에서의 리트(Lied:가곡)·오드(ode:송가)·엘레지(elegy:애가·비가·만가)·마드리갈(madrigal:목가) 등은 모두 이 서정시의 일종이다.

리트

리트는 독일 시의 한 장르로서 가곡(歌曲)을 말하는데, 몇 개의 시절(時節)을 가지며, 일반적으로 소박하고 감미로우며 음악적이어서 노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괴테와 낭만파의 시인들에 의해 많이 만들어졌고, 그것들은 슈베르트·슈만 등의 음악가들에 의해 작곡되었다. 넓은 의미로는 작자 미상의 구전시(口傳詩)로서의 민요(Volkslied)와 시인들에 의한 창작가곡(Kunstlied) 양쪽을 모두 포함하며, 좁은 의미에서는 후자만을 가리킨다.

오드

오드는 특정의 위인이나 장엄한 사상(事象)에 부쳐 이를 우아하고 장중하게 또는 정열적으로 노래한 서정시의 일종으로 흔히 송가·찬가·부(賦)로 번역된다.

그리스에서 비롯되어 후에 프랑스·영국으로 전해졌는데, 프랑스에서는 P. 롱사르의 〈송가집 Odes〉(1550), 영국에서는 P. B. 셸리, J. 키츠의 걸작으로 결실을 맺었다. 또한 오드는 그것이 표현하는 사상의 내용에 따라 영웅적 송가, 종교적 송가, 철학적 송가 등으로 나누어진다.

엘레지

엘레지는 그리스에서 태어난 서정시의 일종으로, 원래는 장단단(長短短) 6보격(六步格)과 장단단 5보격(五步格)의 2행연구로 된 시형인 '엘레게이아'를 가리키는데, 악기에 맞추어 장송곡 등으로 사용되었다.

후에는 그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일반적으로 죽은 이를 위로하고 그를 추모하는 시로, 나아가서는 명상적인 애상시(哀想詩)까지도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엘레지는 애가(哀歌)·비가(悲歌)·만가(挽歌) 등으로 번역된다. 대표적인 엘레지에는 로마의 오비디우스의 〈비가 Tristia〉, 라 퐁텐의 〈님프에게 보내는 보의 연가 Elégie aux Nymphes de Vaux〉(1661), 라마르틴의 〈명상시집 Méditations Poétiques〉(1820), 괴테의 〈로마의 비가 Römische Elegien〉(1788~89),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 Duineser Elegien〉(1923), 밀턴의 〈리시더스 Lycidas〉(1637), 토머스 그레이의 〈시골 교회묘지에서 읊은 만가 An 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 Yard〉(1751), 테니슨의 〈인 메모리엄 In Memoriam〉(1850) 등이 있다.

마드리갈

마드리갈은 14세기의 이탈리아에서 생겨난 가요풍의 서정적 단시(短詩)인 마드리갈레(madrigale)를 기원으로 하는데, 이것은 교묘하게 운(韻)을 교착시킨 몇 개의 시구로 이루어졌고 거기에 곡을 붙여 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불렸다.

16세기 이후 전유럽에 퍼져 일반적으로 세련된 감정이나 기지와 우아한 정서를 담은 단시를 의미하게 되었다. '목가'·'연가'를 뜻하며, 목가적인 연애를 테마로 한 것들이 많다.

극시란 극 형식을 취한 운문시를 말하는데 단테의 〈신곡 La Divina Comedia〉, 바이런의 〈맨프레드 Manfred〉(1817) 등이 유명하며, 한국의 〈처용가 處容歌〉 등도 이에 해당한다. 이와 비슷한 말에, 운문으로 씌어진 극을 의미하는 '시극'(poetic drama)이 있는데, 셰익스피어·코르네유·라신·괴테 등의 희곡과, 현대에는 클로델의 〈비단구두 Le Soulier de satin〉(1924), T. S. 엘리엇의 〈대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Cathedral〉(1935)·〈칵테일 파티 The Cocktail Party〉(1950) 등이 극시로 분류된다.

그러나 시극과 극시와의 차이가 명확하지 않고 때로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외적 분류법

개요

시의 형식이나 운율, 압운의 유무(有無) 등의 시적 구조면으로 보아 정형시(定型詩)·무운시(無韻詩)·자유시(自由詩)·산문시(散文詩)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는 현대시의 형태분류법이기도 하다.

정형시

정형시(a fixed form of verse)는 시절(詩節)의 수, 각 시절을 구성하는 시구의 행수, 각 시구의 음절이나 음보의 수와 압운 등이 규칙적으로 정해져 있는 시를 말하는데, 프랑스 시를 예로 들면 2행연구(distique)·3행연구(tercet)·4행연구(quatrain)·6행연구(sixain)·8행연구(huitain)·10행연구(dizain) 등의 시절에 의해 형성되는 테르자 리마(terza rima), 빌라넬(villanelle), 오드, 소네(sonnet), 발라드, 샹 루아얄(chant royal), 롱도(rondeau) 등이 주된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가 시를 '미의 운율적 창조'라고 정의했을 때, 일정한 각운(脚韻) 구성을 갖춘 몇 개의 연으로 이루어지는 정형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규칙적인 운율은 시의 격조를 높인다거나 의미를 효과적으로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정형시는 장시나 희곡에서는 단조로움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기본적으로는 일정한 보격을 유지하면서 각운을 불규칙하게 사용하는 무운시 형식이 영시에서 태어났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이나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10권 1667, 12권 1678)은 무운시 형식을 구사한 작품이다. 또한 산문의 발달과 더불어 종래의 운율 요소가 전혀 없는 산문 형식에서 시적 효과를 추구하는 산문시가 태동했다. 자유시도 역시 운율로부터는 자유롭지만 구어(口語)의 리듬을 바탕으로, 장단이 불규칙한 시행을 사용하고 있다. 20세기 초반에 "운문은 죽은 기법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운문은 완전히 쇠퇴한 것은 아니고 자유시나 운문시와 나란히 쓰이고 있다.

무운시

무운시(blank verse)는 일반적으로 각운을 갖지 않은 시형을 말하는데, 프랑스어의 'vers blanc'는 이런 의미의 용어이지만 영시에서 말하는 'blank verse'는 특히 각운이 없는 약강 5보격의 시형을 뜻한다.

프랑스 시에서는 이런 시형을 보기 어렵지만 영시에서는 16세기 이후 많은 시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는데, 셰익스피어도 시극의 대부분을 이 시형으로 썼다. 그러나 이러한 시형의 경우에도 운문의 일종으로서 일정한 운율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의 정형성을 지니고는 있지만 정형시의 규칙성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므로 자유시에 가까운 시형이다.

자유시

자유시(free vers)는 일반적으로 정형시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일정한 운율 법칙이나 형식적 기준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시형을 말한다.

유럽 시를 예로 들면 각 시구의 음절이나 음보의 수(즉 시구의 장단), 압운 방법도 완전히 자유로운 시형 또는 일체의 운율법상의 규칙을 부정한 시가 자유시로 일컬어진다. 또 프랑스 시에서는 17세기 고전파 시인들(몰리에르, 라 퐁텐 등)이 사용한 각 시구의 음절수가 동일 음절수로 한정되지 않고 시절이 없거나 한정되어 있지 않은(그밖에는 정형시와 같음) 시를 고전적 자유시라 한다.

19세기 후반에 상징파의 귀스타브 칸, 쥘 라포르그 등이 내면적 리듬의 표현을 추구하여 제창하고 실천했던 것으로 음절수와 각운에 관한 규칙성을 벗어난 자유시 및 그이후의 더욱 철저한 완전 자유시를 근대적 자유시라 한다. 영국·미국에서는 정형시의 전성시대에 자유시형을 구사한 월트 휘트먼 이외에, 특히 1910년대에 들어 이른바 '이미지즘 운동'이 일어나 에즈라 파운드, 리처드 올딩턴, 힐다 둘리틀, 제임스 러셀 로웰 등이 자연 리듬, 구어적 표현을 가진 자유시를 주장했다.

기타 분류법

앞에서 말한 분류법 외에도 시는 다루어지고 있는 소재의 차이에 따라 종교시·사상시·정치시·시사시·전쟁시·연애시·생활시·자연시·풍경시·전원시(목가) 등으로 구별할 수도 있고, 작자에 따라 여성시·아동시·농민시, 문예사조에 따라 고전시·낭만시·상징시·초현실시·민중시·노동시로, 시대에 따라 고대시·중세시·근대시·현대시·전후시 등의 호칭도 사용되고 있다. 또한 풍자시·경구시·교훈시·격언시·우화시·축혼가·진혼가·패러디·반전시·낭송시·전위시·즉흥시 등은 목적이나 성격에 의거하여 분류한 명칭이다.

서유럽의 시

서유럽 시는 그리스로부터 로마에 이르는 고대시와, 중세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유럽 시와는 본래 별개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만 후자는 전자의 영향을 크게 받아 전자를 계승한다는 특징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어느 경우나 먼저 서사시, 뒤이어 서정시·극시가 성행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먼저 호메로스라는 전설적인 시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2대 서사시 〈일리아스〉·〈오디세이아〉가 있다.

이것들은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한 방대한 서사시군(群)의 일부를 이루는 것으로 BC 8세기경에 창작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장기간에 걸쳐 음유시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왔던 것 같다. 이들 영웅이나 신들의 이야기 외에도 서민의 일상생활에 근거한 헤시오도스(BC 700경)의 〈노동과 나날〉, 신화·전설을 정리한 〈신통기 神統記〉 등이 있다.

서정시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알카이오스(BC 7세기)와 사포에 이어 아나크레온이 등장하는데 모두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독창가(獨唱歌) 형식을 쓰고 있다. 합창가(合唱歌)의 작자로는 시모니데스(BC 6~5세기)·핀다로스(BC 6~5세기) 등이 있는데, 이 합창가는 공식행사나 제사의식 때 불렸다. 후에 이 합창용 서정시로부터 비극이 탄생한 것 같다.

알렉산드리아 시대에는 단시의 칼리마코스, 목가의 테오크리토스, 서사시의 아폴로니오스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시의 영향 아래 고대 로마의 라틴시가 시작되었는데, BC 1세기에 먼저 루크레티우스와 카툴루스가, 이어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 서정시인 호라티우스가 등장한다(라틴 문학). 베르길리우스〈아이네이스 Aeneid〉는 트로이가 멸망된 후 살아 남은 영웅이 각지를 방황한 끝에 이탈리아에 로마 제국을 건국하는 이야기인데, 전승을 그 소재로 하면서도 한 사람의 시인의 구상에 의해 창작된 작품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ērum natura〉(6권)는 운문에 따른 철학적 우주론을 다룬 작품이다. 그밖에 정념(情念)의 시인으로 불리는 〈비가〉의 작자인 오비디우스가 있다. 라틴어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에도 오랫동안 유럽의 공통어였으므로 10세기경까지의 유럽 시는 대부분 라틴어로 씌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카르미나 부라나 Carmina Burana〉(12세기경)와 같은 대작 가요집도 있다.

중세에 들어와 그리스도교화하면서 유럽에 정착한 독일계의 여러 민족이 각각의 전승을 바탕으로 신화적·영웅적인 서사시를 탄생시켰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8세기경에 만들어진 영국 최초의 서사시 〈베오울프 Beowulf〉가 있으며, 북유럽의 에다(Edda)와 사가(Saga), 독일의 〈니벨룽겐의 노래 Das Nibelungenlied〉 등의 독일의 성향이 짙은 것과 켈트계의 '아서왕 전설군', 그리스도교의 무훈시(武勳詩)의 성격을 띤 프랑스의 〈롤랑의 노래 La Chanson de Roland〉 등이 모두 12~13세기경에 만들어졌다.

서정시로는 12세기경부터 남프랑스에서 활약한 '트루바두르'라 불리던 시인들의 연애시나 이야기 노래가 '종글뢰르'라는 예술가들에 의해 불려졌고, 북프랑스의 트루베르, 독일의 미네징거 등에게 전해져 귀족계급에 의한 우아한 궁정 서정시의 유행을 불러일으켰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무도가(舞蹈歌)·목가(牧歌) 등의 형태로 생활감정을 자유분방하게 노래한 민중가요의 흐름이 있으며, 이것이 뤼트뵈프(13세기)의 서정시·풍자시 등을 거쳐, 중세 최후의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프랑수아 비용(15세기)으로 이어졌다.

거의 같은 시기에 최후의 궁정시인 오를레앙(Charles d'Orléans)은 모두 발라드나 롱도 같은 정형시의 대표작을 남겼다.

르네상스를 가장 먼저 꽃피운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14세기에 단테가 〈신곡〉·〈신생 Vita Nuova〉(1923경)을, 페트라르카가 소네트 형식으로 감미로운 서정시를 썼고, 16세기에는 다른 유럽 제국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프랑스에서는 말로가 페트라르카의 시들을 번역했는데, 이 새로운 서정시를 바탕으로 한 세브 등의 리옹파, 롱사르 등의 플레야드파가 활약했으며, 풍부하고 아름다운 바로크 시(vers baroque)가 마침내 말레르브에 의해 엄격한 시법으로 정돈되었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셰익스피어가 여러 운문극 외에도 이른바 셰익스피어풍 소네트를 정착시켰고, 한편으로는 존 던 등의 형이상학파 시인들이 출현했다.

스페인에서는 공고라의 서정시, 포르투갈에서는 카몽스의 소네트와 서사시가 나왔고, 이탈리아에서도 타소와 아리오스토의 서사시가 뒤를 이었다. 독일에서는 16세기에 번영한 시민문화로부터 마이스터징거라 불리는 시인들이 등장했으며, 그 대표격인 한스 작스는 수많은 가곡과 사육제극을 만들었다. 종교전쟁의 와중에 프랑수아 도비녜는 격렬한 〈비가 Les Tragiques〉(1616)를 썼으며, 영국의 밀턴은 청교도적 입장에서 〈실락원〉을 썼다.

17세기말경부터 프랑스는 고전주의 시대로 접어들어 코르네유·라신 등의 극시를 탄생시켰는데, 그밖에 자유시형에 의한 라 퐁텐의 〈우화시 Les Fables〉(1668, 1678, 1694)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형식만을 중시한 작품들이 증가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독일의 클롭슈토크가 다감한 정념을 종교적으로 노래했고, 이어 괴테·실러가 주정적인 개성을 표방한 낭만주의적 경향을 분명히 드러냈다. 동시에 이 낭만주의는 민간전승이나 민요에서 소재나 표현형태를 빌려옴으로써 시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했는데, 이것은 인습화된 질서에 대한 반항과 언어표현에 대한, 더 나아가서는 문화 그 자체에 대한 커다란 낙관을 저변에 감추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농촌시인 로버트 번스, 신비적인 환상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등이 영국에 등장한 것도 이 경향에 따른 것이다.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이 이에 박차를 가해 19세기 전반의 유럽은 바로 낭만주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독일 낭만파에서는 노발리스·횔덜린·하이네 등이, 영국에서는 워즈워스·콜리지에 이어 바이런·셸리·키츠 등이 새로운 시풍을 개척했다. 신흥국가인 미국에서는 롱펠로·포 등이 등장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는 독일·영국의 영향으로부터 시작하여 라마르틴·위고·비니·뮈세 등이 개화시켜 네르발에게로 이어졌다. 러시아에서는 푸슈킨과 레르몬토프가 활동했다.

19세기 후반의 시는 영국에서는 테니슨과 브라우닝을, 미국에서는 휘트먼을 배출시켰는데, 이때의 사조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여 고답파(高踏派)에서 상징주의로 이어진다.

먼저 보들레르〈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정신을 노래하는 데에 성공하여 근대시의 출발점을 장식했고, 베를렌이 언어의 음악미를 해방시켰으며, 말라르메는 마침내 언어 그 자체를 가지고 완전한 소우주를 담는 상징시를 만들어냈다.

랭보는 같은 이념을 오히려 다이내믹한 의지의 과정으로 파악함으로써 현대시의 통로를 열어주었다.

이 상징주의로 인해 대두된 새로운 언어관이 20세기 시의 모든 국면에 잠재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 직접적인 계승자가 된 발레리·클로델 같은 시인들뿐만 아니라 '새 정신'을 주창한 아폴리네르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운동에서까지 그 영향을 엿볼 수 있으며, 아일랜드에서는 예이츠, 독일에서는 게오르게, 릴케, 이탈리아에서는 웅가레티 등이 상징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또 라포르그를 거쳐 T.S. 엘리엇에게 전해진 시의 흐름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황무지 The Waste Land〉(1922)를 낳게 했다. 이때부터 제2차 세계대전에 걸쳐 다종다양한 시도가 여러 시인들에 의해 이루어져 현대시는 매우 다면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국의 시

중국의 시는 민중 사이에서 불려지던 노래 속에서 탄생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집은 〈시경 詩經〉인데, 이것은 BC 6세기에 공자가 그때까지의 가요를 편집, 정리하여 펴낸 것이라고 전해진다. 〈시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풍'(風)은 주(周)나라 치하 여러 제후국의 민요이며, '아'(雅)와 '송'(頌)으로 불리는 부분도 전자는 주황실과 관련된 악가(樂歌), 후자는 주황실의 제사 때 불리는 악가이다. 또 〈시경〉의 가장 오래된 주석인 〈모시 毛詩〉의 서문에서도 시와 가요 및 춤과의 관련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시경〉은 후세의 중국의 시가 갖는 성격을 그 발생단계에서 이미 보여주는데, 첫째, 중국의 시는 서정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경〉의 작품은 대부분의 짧은 서정시이며, 그리스의 호메로스의 시 같은 서사시는 볼 수 없다. "시는 뜻[志]이 지향하는 바라, 마음에 있는 것을 뜻이라 하고, 말로 나타내는[發] 것을 시라 한다"라고 〈모시〉의 서문에서 정의하고 있다. 시란 작자의 감동이 언어라는 형태를 빌려 밖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둘째, 〈시경〉은 유가에 의해 5경(五經)의 하나로서 존중되었는데 그들은 〈시경〉을 정치·사회에 적용시켜 해석하려 했다.

즉 시가 민중이나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평성대에는 즐거운 시, 난세에는 원한이 담긴 시, 망국에 즈음해서는 서글픈 시가 생겨난다"라고 한 것도 〈모시〉의 서문에 있는 말이다. 〈모시〉는 언뜻 보면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작품이지만 정치적 풍자를 담고 있는데, 이것은 후세의 중국시가 정치나 사회에 강한 관심을 보인 점과 관련이 있다. 〈시경〉은 원칙적으로 4음절, 즉 네 글자를 한 구로 하여 각 구에는 대개 각운을 붙인다.

즉 4언(四言)이라는 음수율과 엄밀한 각운을 갖춘 정형시였다. 그러나 이 '4언시'라는 형식은 단조로운 리듬이었기 때문에 빨리 쇠퇴해버려 후세에는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후 20세기에 근대시가 생겨나 반드시 압운을 갖추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자유시형이 제창되기까지, 중국에서는 시라고 하면 〈시경〉 이후 거의 모두가 정형시였다.

〈시경〉 이후 전국시대말에 이르러 〈초사 楚辭〉라는 새로운 시가 대두했다.

〈시경〉이 북방 황허 강[黃河] 유역에서 발생한 데 반하여 〈초사〉는 남방 양쯔 강[揚子江] 중류의 초나라에서 생겨났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초사〉는 굴원(屈原)과 그의 제자 송옥(宋玉) 등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소 離騷〉는 대표적 작자인 굴원이 세상에서 참아내기 어려운 자신의 고민을 노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초나라의 가요를 바탕으로 한 특색 있는 시형을 구사했고, 그 표현은 다채로우며 비유가 풍부하고 격렬한 감정표현을 수반했다. 또 일상적인 사건이나 사물에 대해 노래한 것이 아니고, 더러는 초자연의 세계가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굴원 및 송옥 등을 실재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확증은 별로 없다. 역시 〈시경〉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집단적인 노래로 보는 쪽이 오히려 무난할 것이다.

〈초사〉의 시형은 3언(三言)을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리듬에 맞추어 조자(助字)인 '혜'(兮)가 자주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형식, 즉 '사'(辭)는 한대에 들어와서 '부'(賦)라 불리는 장편의 미문(美文)으로 전화(轉化)하여 운문과 산문의 중간적 성격을 띠게 되자 전통적인 장르의 구분에서는 시 속에 넣을 수 없게 되었다.

대에 이르러 민간의 가요 속에서 5언 형식이 지식인들에 의해 채택되어 '5언시'가 성립되었다.

〈문선 文選〉에 수록된 작자 미상의 〈고시19수 古詩十九首〉는 5언시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때부터 중국의 문학은 비로소 가요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시를 갖게 되었다. 이 5언시는 삼국·남북조 시대 및 수·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약 400년간 중국시의 주류를 이루었다. '7언시' 형식도 생겨나긴 했었지만 당대에 이르러 활발하지 못해 시라고 하면 5언시를 의미했다.

이런 가운데서 시는 점차 문학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후한말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조식(曺植)을 중심으로 한 문학집단이 형성되었고 5언시의 창작이 왕성해졌다. 이때에 비로소 개인의 서명이 들어간 작품집이 탄생했는데, 세상에서 '건안문학'(建安文學)이라 불리는 이 시기야말로 중국시 사상에 하나의 획을 그은 때로 보아야 할 것이다.

건안의 시인들에 이어 나타난 것은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대표격이었던 완적(阮籍)과 혜강인데, 그들의 시는 당시의 어두운 사회상을 반영한 진지하고 깊은 사색을 담은 철학적인 시였다.

완적(Juan Chi)
완적(Juan Chi)

중국시는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기교적인 면에서 발전을 이루었는데 그 하나가 대구(對句)의 기법이다.

또 하나는 시의 음율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데, 중국어 고유의 4성조, 즉 사성(四聲)을 조화시켜 쓰는 데 주의를 기울이게 된 점이다. 그중에도 양나라의 심약(沈約)은 〈사성보 四聲譜〉를 지어 이 분야에 크게 공헌했다. 남조(南朝)의 시 특색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은 남제(南齊)의 사조(謝脁)의 작품이다.

남조의 시는 기교면의 발전에 따라 섬세한 감각과 정밀한 묘사를 지향했는데 양대에 이르자 간문제(簡文帝)를 중심으로 하는 '궁체'(宮體)의 시인들을 탄생시켰다. 궁체란 주로 여성의 미를 읊은 것으로 관능적·퇴폐적인 측면을 지닌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작품을 모은 것이 〈옥대신영 玉臺新詠〉이라는 사화집(詞華集)이다. 한편 〈문선〉은 이러한 당시의 시풍에 대한 반발로 엮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동진(東晉)말부터 송대에 걸쳐 중요한 시인으로는 도연명(陶淵明)·사영운(謝靈運)이 있다.

도연명(Tao Yenming)
도연명(Tao Yenming)

도연명은 전원시인으로 시단의 주류 밖에 있었던 시인인데, 그의 시는 알기 쉽고 분명한 용어 속에 깊은 사색을 담고 있다. 사영운은 강남의 산수미(山水美)를 노래하여 산수시의 창시자가 되었다.

중국시는 대에 이르러 절정기를 맞는다. 당의 시인들은 위·진 나라로부터 남북조를 통해 발전해온 5언 형식을 이어받고 다시 7언 형식을 완성시켰다. 또 시에 고체(古體)와 금체(今體:또는 近體)의 구별이 정해진 것도 이 시대이다.

고체란 비교적 자유로운 형식의 시이며, 금체란 운율이 일정한 형을 따른 것으로서 율시(律詩)와 절구(絶句)가 이에 해당한다. 당대 최대의 시인은 이백(李白)·두보(杜甫)로 이백은 고시와 절구를 잘 지었고, 두보는 율시를 완성시켰다. 그밖에도 산수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왕유(王維), 호방(豪放)한 시풍의 한유(韓愈), 유려평이(流麗平易)한 시풍의 백거이(白居易), 7언절구에 뛰어난 두목(杜牧), 남녀의 사랑을 노래한 걸작품을 남긴 이상은(李商殷) 등이 유명하다.

이백
이백

대초에는 한동안 만당풍(晩唐風)의 감상적인 시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11세기 전반의 구양수(歐陽修)·매요신(梅堯臣)의 출현과 함께 보다 이지적·사변적으로 변하여 격렬한 감정을 그대로 토로하는 일은 적었고, 또 소재도 더욱 일상생활에 국한되기에 이르렀다.

송대의 시인들은 시형은 그대로 이어받아 두보와 한유 등으로 대표되는 당대의 시를 조술(祖述)했지만, 그들이 완성시킨 시풍은 당의 시와는 약간 다른 것들이었다. 송대에는 시인들의 숫자도 당대에 비해 비약적으로 증대했다. 당대까지만 해도 시는 거의 사회의 상류층, 고급 지식인들에 의해서만 지어졌는데 송대, 특히 12세기 남송시대가 되자 일반 민중 사이에서도 시인들이 배출되었다. 이것은 시와 사회·문화와의 관계라는 점에서 보면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은 북송의 소식(蘇軾)이며, 그밖에 왕안석(王安石)·황정견(黃庭堅) 등이 있다.

남송에서는 육유(陸游)·범성대(范成大)·양만리(楊萬里) 등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대에 들어와서는 당시와 송시 중에 어느 시풍을 계승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 독자적이고 새로운 시풍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각 시대에 우수한 시인을 배출시키긴 했지만 당시나 송시 같은 빛을 발하는 작품을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20세기에 이르자 이른바 문학혁명(1917)이 일어나 신시(新詩:현대시), 즉 백화시(白話詩:구어에 의한 자유시)가 신문학(新文學) 장르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구시(舊詩), 즉 고전시가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다. 중국 문학사에서 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누려왔다. 한대에는 '부'가 성행했지만, 5언시가 성립되자 시는 점차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 가장 존중받기에 이르렀다.

그런 경향은 당대에 이르러서 시가 고급관료 자격시험인 과거에서 최고의 중요과목으로 간주된 일도 있으며 시작(詩作)은 관료가 되려는 지식인들에게는 필수적인 교양물이었다. 그러므로 중국 시인들의 대다수는 고급관료로서 국정에 참여했거나 또는 그것을 지향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중국 시는 언제나 시사적인 문제에 강한 관심을 나타내는 일면을 지니고 있으며 세상의 악덕이나 민중의 고통을 소재로 당국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를 가한다. 이는 앞에서 말한 〈시경〉 이후 전통과 한대의 '악부'(樂府)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인데, 그 전형적인 예를 두보의 작품 및 백거이의 〈신악부 新樂府〉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신악부〉란 명칭은 민간의 실정, 즉 정치적·사회적 병폐를 천자에게 알린다는 악부 본래의 취지로 되돌아간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중국문학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중국 시가 근대, 특히 문학혁명운동 이후 그동안 누리던 최고의 지위를 소설에 양보한 사실은 다른 현대 국가들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시의 역사

한국 시의 개념

한국의 시를 시라는 용어 대신 향가·가사·시조·창가 등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역사적 모습의 다양성과 용어의 다양성에 기인하며, 또 이들을 가리켜 '시가'라고도 하고 '시'라고도 하는 것은 입으로 노래했는가 또는 글로 써서 읽었는가 하는 향유방식의 차이에 기인한다.

그런가 하면 시를 가리켜 순수한 정서의 표출이라고도 하는 반면에 사람을 흥분·고양시키는 문학양식이라고도 하는 것은 시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데 따른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의 공통된 특성으로 간주되는 것으로 우선 노래로서의 성격을 들 수 있다. 예전에는 시가 입으로 구전되는 것을 전제로 했는데 그 구체적 사례는 상대시가·향가·고려가요·시조·악장·가사·창가 등이며 이 장르에 속하는 작품들은 구전되었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시가 구전적 성격을 벗어나 글로 쓰고 눈으로 읽는 것으로 바뀐 것은 근·현대시이며 이 시들은 노래로서의 자취를 율격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므로 고전시대의 시를 시가라고 하여 근·현대의 시와 구분하기도 한다.

상대시가

아득한 옛날 우리 민족의 시가 어떠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살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시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지만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다만 몇 가지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서 그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는 것은 BC 2세기경부터이며 작품의 수도 〈공무도하가〉(일명 공후인)·〈황조가〉·〈구지가〉 등 3~4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 노래들은 한자로 번역되어 전하므로 노래의 원모습은 알기 어렵고 그 노래들의 성격에 대해서도 해석이 구구하다. 다만 〈공무도하가〉는 흰머리를 풀어헤치고 강물에 빠져 죽은 남자를 뒤따르던 여인의 사연이고, 〈황조가〉는 두 아내 중 달아난 한 사람을 뒤쫓다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부른 노래여서 개인적인 정서를 드러낸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에 〈구지가〉는 개인적인 정서보다는 임금을 맞이하기 위한 집단의 노래로 의식이나 노동에 관계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향가

향가는 신라 때에 창작되어 고려 때까지 존속했던 장르로서, '사뇌가'(詞腦歌)라고도 부른다.

〈삼국유사〉에 14수, 〈균여전〉에 11수가 전하는데, 우리 문자가 없던 시대이기 때문에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쓴 향찰로 표기되어 있고, 형식은 4·8·10구체로 나뉜다. 향가의 내용은 매우 다양하다. 노동요로 짐작되는 〈풍요〉가 있는가 하면, 서정적 성격이 강한 〈원왕생가〉·〈제망매가〉·〈헌화가〉·〈처용가〉·〈모죽지랑가〉·〈찬기파랑가〉, 교훈적 성격이 강한 〈안민가〉·〈우적가〉 등이 있다.

또한 주술적 성격이 드러나는 〈도천수관음가〉·〈도솔가〉·〈혜성가〉·〈원가〉 등이 있는가 하면 〈서동요〉처럼 놀이적 성격이 강한 것도 있다. 반면에 〈균여전〉에 전하는 11수는 〈보현십원가〉라는 제목 아래 부처님께 10가지 기원을 하고 거기에 서시를 붙인 연작시로서 불교적 찬가의 성격이 강하다.

향가의 작자는 〈서동요〉를 지은 어린아이부터 〈풍요〉를 지어 부른 다수의 신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지만 월명사(月明師)·충담사(忠談師)·신충(信忠)·영재(永才)처럼 승려나 벼슬아치들이 상당수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당시의 상층인이라서 기록으로 남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학자는 이 이름들이 고유명사가 아니라 '월명'은 달이 밝았다는 사실과 관계되며 '충담'은 충성스러운 말이라는 뜻으로 보아 보통명사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헌화가〉처럼 작자가 '소 끌고 가던 노인'이라고 알려진 것도 있고, '동해 용왕의 아들'로 지칭되는 '처용'처럼 정체를 확실히 알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고려가요

고려 때 지어지고 불렸던 노래를 통틀어 고려가요라고 하는데 이들 노래가 민요적이라고 하여 '속요'라고도 한다.

고려가요의 노래말은 3, 4줄 정도로 짧은 길이를 가진 〈유구곡〉·〈상저가〉·〈가시리〉·〈사모곡〉 등이 있는가 하면, 〈처용가〉나 〈이상곡〉처럼 긴 길이를 가진 것도 있고, 〈서경별곡〉·〈청산별곡〉·〈만전춘〉·〈쌍화점〉·〈동동〉·〈정석가〉와 같이 4~5연에서 8연 또는 심지어 13연에 이르는 것도 있다. 또 작품명에 '별곡'이라는 말이 붙은 것에 주목해서 고려가요라는 명칭 대신에 '별곡'이라고 장르명을 붙이기도 하며, 그중에서도 〈한림별곡〉처럼 '위 경긔 엇더이미지니잇고'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작품들을 따로 나누어 '경기하여체가' 또는 줄여서 '경기체가'라고도 한다.

고려가요의 주된 특징은, 대체로 작자를 알 수 없다는 점과 남녀간의 애정이나 욕망을 거리낌없이 표현했다는 점, 그리고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법이 많이 보인다는 점이다.

고려가요는 주로 〈악장가사〉·〈악학궤범〉·〈시용향악보〉 등에 기록되어 전하는데, 이 문헌들이 모두 음악책인 것으로 미루어 고려가요는 모두 가창되었음이 분명하며, 문헌의 성격이나 음악의 특성으로 보아 궁중의 음악 또는 적어도 상층인이 즐기던 음악이었음이 확실하다.

악학궤범
악학궤범

따라서 노래말의 적나라함이나 형식적으로 민요에 가까운 하층민의 노래가 어떤 계기로 궁중 또는 상층민의 음악으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런 특성이 '남녀상열지사'로 지탄을 받으면서 노래말을 바꾸거나 더이상 향유되지 못한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악장

악장이란 조선 초기에 나라의 공식행사인 제례나 의식에서 악곡에 맞추어 부를 목적으로 지어진 노래이다.

조선 건국의 필연성과 신성성을 정당화하고 강조한 〈용비어천가〉와 불교찬가라 할 수 있는 〈월인천강지곡〉이 두드러지며, 그밖에 조선 왕업을 송축한 정도전의 〈신도가〉, 작자 미상의 〈감군은〉·〈유림가〉 등이 있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창작되었기 때문에 정도전·정인지를 비롯해 수양대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왕조의 주인의식을 가진 사대부와 왕족이 작자의 주를 이루었다.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월인천강지곡

형식을 보면 〈용비어천가〉는 125장, 〈월인천강지곡〉은 580여 장의 길이를 가진 데 비해 다른 작품들은 4~8장에 불과하여 형식상으로는 차이가 많다.

시조

시조는 고려 말엽에 창작되기 시작했으나 주로 향유된 시기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시조라는 명칭은 '고조'(古調)에 상대되는 뜻을 가진 음악의 명칭이었다. 용어가 암시하는 바와 같이 시조는 음악에 맞추어 부르던 노래로 향유되었는데, 음악으로는 가곡창과 시조창의 두 종류가 있었다. 시조는 초장·중장·종장의 3장으로 되어 있고, 각 장은 4개의 마디로 되어 있어서 전체가 대체로 45자 안팎이다. 또한 각각의 마디는 대체로 3~4자로 되어 있는데, 다만 종장의 첫 마디는 3자를 반드시 지켰으며 둘째 마디는 5자 이상으로 되어 있음이 특이하다.

그밖에 각 마디는 글자 수에 엄격한 제한을 두지 않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잘 정돈된 균형미를 지니는데, 이러한 정형을 지닌 것을 가리켜 평시조라 하고, 그런 정형을 갖추면서 하나의 제목 아래 여러 수의 시조가 모인 것을 연시조라고 한다. 연시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주세붕의 〈오륜가〉, 이황의 〈도산십이곡〉, 이이의 〈고산구곡가〉, 윤선도의 〈오우가〉 등이 있다. 또한 이러한 기본형을 깨뜨린 것을 사설시조라 하는데, 초장·중장·종장의 어느 한 장 이상이 제한 없이 자유롭게 길어지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사설시조는 잘 짜여진 형식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온 파형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주제는 평시조에 담아내기 어려웠던 파격적인 것이나 긴 사연인 경우가 많고, 그런 탓인지 사설시조에는 작자를 밝히지 않은 작품이 많다.

평시조의 내용은 멸망한 고려왕조에 대한 회고(이색·원천석·길재 등), 새로운 왕조에 대한 찬양과 포부(맹사성·김종서 등), 새로운 조선왕조가 내걸었던 경건주의적인 삶의 고무(이현보·이황·정철 등), 그러한 삶의 모습인 강호에서의 안빈낙도(이이·윤선도·박인로 등)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와는 달리 압축된 형식에 개인적 정서의 표출(황진이·임제 등)도 다른 한 주류를 이루었다.

내용이 이러한 것은 시조가 주로 상층인인 사대부에 의해 향유되었던 데 기인하며, 그 계층과 긴밀했던 기녀나 가객들에 의해 창작되고 불렸던 전통과 관계가 깊다. 시조는 문자보다는 노래로 지어지고 전해졌는데, 이것이 본격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이후 〈청구영언〉·〈해동가요〉·〈가곡원류〉 등의 가집이 만들어지면서였고 작품의 수는 3,500여 수에 이른다. 현재 전하는 시조의 노래말이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게 되어 있음은 시조의 구전문학적 성격을 입증해준다.

청구영언(靑丘永言)
청구영언(靑丘永言)
가곡원류
가곡원류
가사

가사는 3~4자로 된 마디가 2개씩 짝을 이루어 내용에 따라 제한 없이 길어질 수 있는 형식을 가진 장르로서, 길이가 길다는 특성과 관련하여 시조를 '단가'(短歌)라 하고 가사를 '장가'(長歌)라 부르기도 한다.

가사는 고려말에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지은 〈서왕가〉나 조선 성종 때 정극인이 지은 〈상춘곡〉을 효시로 삼으며, 조선시대에 등장, 소멸했기 때문에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시가 장르 가운데 하나로 손꼽는다. 가사의 내용은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정극인의 〈상춘곡〉, 이이의 〈낙빈가〉, 허전의 〈고공가〉, 이원익의 〈고공답주인가〉, 박인로의 〈누항사〉, 남도진의 〈낙은별곡〉 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린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 박인로의 〈사제 곡〉 등이 또다른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가 하면 비교적 긴 체험이나 깨달음을 알리기 위한 기행가사나 종교가사가 상당수에 달했는데, 김인겸의 〈일동장유가〉를 비롯한 일본 기행이 있고, 홍순학의 〈연행가〉, 유인목의 〈북행가〉 등은 중국 체험을 노래한 것이다. 또한 종교가사로는 나옹화상의 〈서왕가〉를 필두로 사명대사의 〈회심곡〉으로 이어지는 많은 불교가사가 전해지고, 천주교에 관련된 이벽의 〈천주공경가〉 등 상당수의 작품이 있으며, 최제우의 〈용담유사〉로 대표되는 동학가사가 있다. 이밖에도 실용의 관점에서 농가의 할 일을 노래한 정학유의 〈농가월령가〉나 여성들의 놀이를 묘사한 〈화전가〉류와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 교훈을 적은 〈계녀 가〉류의 가사도 상당수에 달한다.

일동장유가
일동장유가

그밖에 조선시대의 역사를 노래한 〈한양가〉가 있는 반면, 이와는 달리 정서적인 감회를 노래한 정철의 〈사미인곡〉 또는 〈속미인곡〉을 비롯해 허난설헌의 〈규원가〉 등도 있어 가사야말로 무슨 내용이든 노래할 수 있는 장르로서의 특성을 보인다.

시대적으로 볼 때 임진왜란 이전의 가사가 두 마디로 된 구가 200구 안팎의 짧은 형식임에 반해 임진왜란 후에는 길이가 제한없이 길어지는 변화를 보였고, 대체로 사대부들이 작자로 밝혀진 경건한 내용에서 점차 대상을 해학적으로 묘사하면서 좀스러운 것들을 주제로 삼는 경향으로 바뀌어 간 점은 작자를 밝히지 않는 경향과 더불어 새로운 변화였다.

이러한 후기적 경향을 나타낸 작품으로는 〈우부가〉·〈용부가〉·〈노인 가〉·〈노처녀가〉·〈규수상사곡〉·〈과부가〉 등이 있다. 이와 같은 장형화 및 희화화는 가사의 속성이 노래하는 장르로부터 읽는 장르로 변해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개화기 시가

한국에서 개화기에 해당되는 시기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를 말한다.

서양 문물의 전래와 국제정치의 갈등 속에서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오자 시도 그에 따라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일본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양식의 실험으로 신체시창가가 등장하고, 인쇄 매체인 신문과 잡지의 발간으로 개화시와 개화가사가 지어지는 등 새로움을 추구하는 경향과 옛 것에의 집착이 뒤섞여 나타났다. 신체시는 주로 최남선에 의해 잡지 〈소년〉을 중심으로 〈해에게서 소년에게〉·〈꽃두고〉 등의 작품이 실험되었는데, 개화라는 목적을 지향하되 자유로운 율격을 시도했으나 더이상 발전하지 못했다.

그 대신 최남선은 일본의 음수율인 7·5조를 채용한 창가라는 형식을 도입하여 〈경부철도가〉·〈세계일주가〉 등을 지어 선각자로서의 교훈적인 의도를 드러냈다. 반면 개화사상의 강조와 민족보존의 고취라는 이중적 목적을 담은 개화시조, 개화가사 및 개화창가는 〈독립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중심으로 독자 투고란에 실리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개화기는 노래하는 시가에서 쓰고 읽는 시로 변화해가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1920년대 시

1918년 〈태서문예신보〉에 김억이 '상징주의'를 소개하고 〈봄〉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시는 새로운 전환을 맞이한다.

서구의 근대시로부터 배워들인 '읽는 시', 그리고 '우리'가 아닌 '나의 정서로서의 시'라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창조〉(1919)라는 동인지에 발표된 주요한〈불놀이〉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이 작품은 시가에서 시로의 전환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에 대한 인식이 이처럼 변화한 것과 3·1운동의 실패로 더욱 암담해진 현실은 병적인 개인의 정서 표출의 시로 몰아갔고, 〈백조〉·〈폐허〉 등의 동인지를 중심으로 황석우의 〈석양은 꺼진다〉, 오상순의 〈방랑의 마음〉, 홍사용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박종화의 〈오뇌의 청춘〉, 박영희의 〈월광으로 짠 병실〉 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은 병적인 어조의 슬픔을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김기진의 〈백수의 탄식〉,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 등과 같이 식민지의 현실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민족적인 것에 매달려 식민지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김억의 〈신미도 삼각산〉으로 대표되는 민요적 정서를 담은 시와, 변영로의 〈논개〉 등과 주요한·이광수 등이 중심이 된 민요시 운동도 있었으며 양주동·이병기 등에 의해 시조부흥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일제강점기).

그러나 이 시기의 가장 훌륭한 시는 김소월한용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김소월은 〈진달래꽃〉·〈먼 후일〉·〈접동새〉·〈못잊어〉·〈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등에서 한국적인 역설의 정서를 적절한 율조에 담아냈고, 한용운은 〈님의 침묵〉·〈알 수 없어요〉·〈복종〉 등 불교적 발상법에 근거하여 삶의 본질을 꿰뚫는 시들을 발표해 한국시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님의 침묵
님의 침묵
1930년대 시

1930년대는 정지용·김영랑·김광균·이상·김기림 등 시의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는 시인들이 등장함으로써 현대적인 시로 변모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지용은 〈백록담〉·〈향수〉로 대표되는 시들에서 절제된 언어와 형상성을 추구했으며,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등에서 개인적 정서의 절실한 표현을 추구했고, 김광균은 도시의 풍경을 회화적으로 그려낸 〈와사등〉·〈기항지〉 등을 발표했으며, 이상은 〈오감도〉로 대표되는 다다이즘 경향의 시를 발표했는가 하면, 김기림은 〈바다와 나비〉 등을 통해 신비한 이미지로 대표되는 참신성을 구현하고자 했다.

김영랑
김영랑

이러한 경향은 시창작의 방법에 대한 혁신을 통해 순수시의 예술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식민지 현실의 참혹함에 대한 인식을 이야기하듯 드러낸 시도 있었다. 임화의 〈제비〉, 이용악의 〈낡은 집〉 등을 비롯해 백석·오장환 등의 시는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강화될수록 민족과 민중의 열망이 강화됨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작품은 오랫동안 한국문학사에서 금기시되었다가 1980년 이후 논의되었다.

1940년대 시

1940년대는 8·15해방을 중심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해방 이전의 시는 다음과 같은 4가지 경향으로 전개되었다. 첫째, 1930년대 후반에 등장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된 순수 서정시로서, 서정주의 〈화사〉·〈자화상〉·〈귀촉도〉, 유치환의 〈깃발〉·〈일월〉·〈광야에 와서〉 등은 순수 서정을 추구하면서도 근원으로서의 생명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뜻에서 '생명파'로 불리기도 한다. 둘째, 민족의 현실을 전환된 표현으로 형상화한 시로서, 이육사의 〈청포도〉·〈절정〉, 윤동주의 〈자화상〉·〈또다른 고향〉 등이 있다.

셋째,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로서, 박두진의 〈향현〉·〈해〉, 조지훈의 〈고풍의상〉·〈봉황수〉, 박목월의 〈길처럼〉·〈나그네〉로 대표되는 이른바 '청록파'의 시이다. 넷째, 일본 식민지 정책에 굴복하여 친일을 강조한 시로서, 김동환의 〈미영장송곡〉, 이광수의 〈새해가 왔네〉, 김기진의 〈가라, 군기 아래로, 어버이들을 대신해서〉, 노천명의 〈부인근로대〉 등이 있다.

해방과 더불어 시집의 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과 함께 새로이 전개된 시의 경향은 우선 해방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순수시를 지향하던 시인들이 서정과 지성을 강조한 데 반해, 이용악의 〈오랑캐꽃〉, 박아지의 〈심화 心火〉, 오장환의 〈병든 서울〉과 〈나 사는 곳〉, 임화의 〈찬가〉 등의 시집에서는 전투성과 이념성을 강하게 부르짖었고, 이러한 경향은 뒤에 남북이 분단되면서 시인들의 활동무대를 달리하게 했다.

1950년대 시

1950년대는 6·25전쟁으로 시작되었으므로 남한과 북한의 시로 갈라져 전개되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모윤숙의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유치환의 〈보병과 더불어〉와 같이 반공 애국의식을 고무함으로써 승전의식을 고취하는 시와, 조지훈의 〈다부원에서〉처럼 전쟁의 비극성과 자유의 소중함을 노래한 시가 씌어졌고, 구상의 〈초토의 시〉처럼 전쟁의 참상과 분단의 비극을 고발하기도 했다.

이와는 달리 조향·박인환·김경린·김규동·김수영·김춘수·김광림 등 이른바 '후반기' 동인을 중심으로 한 시인들은 〈현대의 온도〉(1957)와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1957) 등의 시집을 발간해 도시와 문명과 전쟁 후의 현실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고민을 그려냈다. 이러한 경향은 순수시와 모더니즘적인 경향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외에도 이 시기에는 이동주의 〈강강수월래〉, 박재삼의 〈피리〉와 〈춘향이 마음〉, 서정주의 〈귀촉도〉로 대표되는 전통적 정서를 아름답게 읊은 시와 한하운의 〈보리피리〉처럼 천형의 병을 앓는 고통을 담아낸 시도 나왔다.

1960년대 시

1960년대는 4·19혁명5·16군사정변으로 설명되는 시대로서, 이 시기의 시 또한 이러한 정치적 사건과의 깊은 관련 속에서 전개된다.

먼저 4·19혁명은 많은 격려시를 낳았는데, 박두진의 〈우리는 아직 깃발을 내린 것이 아니다〉,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5·16군사정변은 그러한 흥분을 가라앉히는 사건이었고 그결과 시는 서정과 언어의 탐구라는 현실 외면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발표된 박남수의 〈새〉, 김춘수의 〈처용〉,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 오세영의 〈불〉 등은 감수성의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언어의 아름다움과 이미지의 깊이를 통해 시의 순수한 세계를 추구한 것이다. 이와는 달리 현실을 고발하고 인간의 삶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노래한 이성부의 〈전라도〉, 조태일의 〈국토〉 등은 억눌린 자의 울분과 자유민주주의의 시련 등을 드러낸 작품이다.

1970년대 시

1970년대의 시는 정치적 경직성과 산업화가 불러온 모순에 대한 반동으로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었다.

김지하의 〈오적〉은 당대 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나타난 부조리를 풍자하고 야유함으로써 시를 통한 참여를 보여주었고, 신경림의 〈농무〉, 고은의 〈빈집을 지나면서〉는 산업화에 따른 농촌의 실상을 고발했으며, 김광규는 〈묘비명〉을 통해 현실의 모순을 풍자했다. 이 시기에도 순수 서정의 추구에서 문학성을 옹호하려는 노력이 송수권·나태주 등에 의해 지속되었으며 많은 시인들이 이러한 경향의 시를 썼다.

1980년대 시

1980년대의 시는 1970년대의 고발과 풍자의 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민중을 옹호하고 대변하면서 이념을 지향하거나, 또는 기존의 예술에 대한 관점을 부정하고 노동자 스스로가 창작에 나선다는 노동시로 나아가는 경향을 보였다.

시는 시인이 아니라 일하는 노동자가 써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혼자서 쓰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 창작해야 한다는 구호도 등장했다. 그러한 주장이 구체적 성과를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지만 김정환의 〈언 땅을 파내며〉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등은 새로운 경향의 시임이 분명하다. 그밖에 현실의 질곡과 뒤틀림을 고발하면서도 방법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인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등은 또 다른 새로운 경향의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