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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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표기 언어 Middle Ages , 中世

요약 중세는 중요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발전의 시기였으며 인문주의자들이 활약한 르네상스 시대 사회변혁으로 이어지는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다.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 유럽을 하나의 거대한 그리스도교 왕국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12세기에 문화적·경제적 부흥이 일어났다. 예술과 건축에서는 고딕 양식이 발전했다. 도시가 번창하고 상인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13세기는 중세문명의 절정기였다. 고딕식 건축과 조각의 고전적 정형이 확립되었고 많은 종류의 사회적 단위 등이 생겨났다. 지적 생활 분야는 스콜라 철학이 발전했다. 중세의 봉건적 사회구조의 붕괴와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발전 및 스페인·프랑스·잉글랜드 등의 국민국가의 등장과 아울러 문화적 발전들은 새로운 정신을 지닌 르네상스 시대의 탄생을 가져왔다.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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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명칭과 그것에 따르는 관례적 의미는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나쁜 뜻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고전적인 학문과 문화를 부활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1,000년에 걸친 암흑과 무지의 시대가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와 자신들을 갈라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생각은 인문주의자들의 업적과 이상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 인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특출함을 내세우기 위해 중세라는 시대를 창안해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세는 중요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문화적 발전의 시기였으며 인문주의자들이 활약한 르네상스 시대 사회변혁으로 이어지는 토대를 마련한 시기였다(휴머니즘).

410년 여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한 사건은 서방세계의 정치구조와 사회분위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은 유럽 대부분과 아시아·아프리카 일부 지역에 대해 사회적 응집력의 토대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5세기에 유럽 남부와 서부로 이주한 게르만 부족들은 결국 그리스도교로 개종했지만 자기들의 관습과 생활양식을 대부분 유지했다. 그들이 새로 들여온 사회조직형태의 변화로 중앙집권적 정부와 문화적 통일은 불가능해졌다. 로마 제국시대에 이룩한 비교적 효율적인 농경술이라든가 광범위한 도로망, 급수체계, 선박 운항로 같은 질적으로 향상된 대부분의 생활방식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되었고 예술적·학문적 성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퇴보현상은 로마의 몰락부터 1000년에 이르기까지 암흑시대라고도 하는 초기 중세에 지속되었으며 다만 샤를마뉴 대제가 확립한 카롤링거 왕조의 개화기에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을 뿐이었다. 막간의 그 시기를 제하고는 한시도 거대한 왕국이나 어떤 다른 정치구조가 유럽에 자리잡고 안정을 이룩한 적이 없었다.

사회적 통일성의 토대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이었다. 따라서 중세는 정신적인 기반 위에 정치구조를 세우려고 시도하는 혼란스럽고도 모순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조차도 르네상스 시대 직전에 세속사회에 확고하게 뿌리 내린 예술적·상업적 활동들이 이루어지면서 종지부를 찍었다.

로마 제국의 해체 이후 유럽을 하나의 거대한 그리스도교 왕국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었다.

그리스도교 왕국은 성직자단과 세속통치권자들이라는 2개의 뚜렷이 구별되는 직능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론상으로 이 두 집단은 서로 보완하는 관계로서 각기 인간의 정신적 요구와 세속적 요구를 충족하는 역할을 했다. 이중 첫번째 영역에서는 교황이 지상권(至上權)을 행사했으며 2번째에서는 황제가 행사했다. 실제로는 이 두 권력이 서로 끊임없이 분쟁과 불일치에 직면하거나 공공연한 전쟁을 벌였다. 황제는 종종 성직임명권과 교리문제에 관여할 권리를 요구하면서 교회활동을 규제하려 했다.

한편 교회는 도시와 군대를 소유할 뿐 아니라 국정문제에까지 간섭하려고 했다. 예컨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죄악이 저질러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proratione peccati) 적대하는 군주들간의 세속적인 분쟁을 중재할 권리가 교황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다른 교황들은 파문을 지배도구로 사용했으며 황제의 지위를 박탈할 권리까지 주장하기도 했다(교회와 국가).

12세기에 문화적·경제적 부흥이 일어났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르네상스의 기원을 이 시대에서 찾고 있다.

경제력의 중심은 서서히 지중해 동부지역으로부터 서유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예술과 건축에서는 고딕 양식이 발전했다. 도시가 번창하고 여행과 교통은 더 신속하고 안전하고 손쉽게 되었으며 상인계급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농업의 발전도 이러한 발전의 한 가지 밑바탕이 되었다. 12세기에는 콩의 경작이 이루어져 사상 최초로 모든 사회계층이 균형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구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이것은 결국 낡은 봉건적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요인이 되었다.

13세기는 중세문명의 절정기였다. 고딕식 건축과 조각의 고전적 정형이 확립되었고 서로 다른 많은 종류의 사회적 단위 등이 생겨났다. 길드라든가 조합, 시회의, 수도회 등이 결성되어 각기 어느 정도의 자율성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중대한 의미를 갖는 법적 대표 개념이 발달하여 자신들을 선출해준 공동체와 결부된 문제에 관해 전적인 결정권을 갖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정치적 회의체가 생겨났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도하는 지적 생활 분야는 스콜라 철학으로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그 뛰어난 대변자인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교부들에 관한 저작을 통해 서양 지성사에서 가장 위대한 종합의 하나를 이룩해냈다. 중세에 이루어진 봉건적 사회구조의 붕괴와 이탈리아 도시국가의 발전 및 스페인·프랑스·잉글랜드 등지의 국민국가의 등장과 아울러 세속교육의 발달과 같은 문화적 발전들은 새로운 정신을 지닌 자의식적인 새 시대의 탄생을 가져왔는데, 이는 곧 고전적 학문을 자기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였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